교육지청·기차역 위치한 중심지
마을 입구 수령 160여년 보호수
터만 남은 남강서원, 1571년 창건
3백여년 인재 기르던 교육기관
훼철 때 유물 묻었지만 도굴 당해
2022년부터 석축·기단 등 관리

 

영덕군 영덕읍 우곡리는 동쪽으로 고불봉이 솟아 있고 남서쪽으로는 오십천이 흐른다.‘우곡’이란 지명은 영덕의 관문에서 볼 때 오른쪽 골짜기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영덕읍사무소와 교육지원청, 영덕역 등 주요 기관들이 들어서 있는 영덕읍 중심지 마을이다.

 

명품의 사전적 정의는 ‘오랜 기간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며 상품적 가치와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는 고급품을 일컫는 말’이다. 물건에 붙이면 명품, 작품에 붙이면 명작이 된다. 산은 명산, 사람은 명인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명(名)이란 글자를 붙이려면 그 이름값을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을에도 명품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곳이 명품 마을일까. 산과 강이 어우러진 뛰어난 자연환경과 마을의 이름을 빛낸 인물이 있고, 높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정을 나누는 마을이라면 명품마을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덕(德)이 가득한 영덕(盈德) 우곡리가 바로 그런 곳이다.

‘우곡’이란 지명은 영덕의 관문에서 볼 때 오른쪽 골짜기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동쪽으로 고불봉이 솟아 있고 남서쪽으로는 오십천이 흐른다. 마을 남쪽에 강이 흐르고 있어 ‘남강’(南江)이라고 불러오다 남강서원이 창건되자 서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영덕읍사무소와 교육지원청, 영덕역 등 주요 기관들이 들어서 있는 영덕읍 중심지 마을이다. 명품길이 있고 1960-70년대 우리나라 최고 스타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강서원 표지석

 

우곡리 마을에 있었던 남강서원은 1571년 영덕현령 ‘정자’가 유림의 요청을 받아 창건했다. 남강서당으로 건립되었다가 1621년 서원으로 승격하면서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배향했다. 묘우와 직방재, 장서각 등 총 43칸으로 이루어진 큰 서원이었다. 규모가 큰 만큼 법도도 엄격했다. 3백여 년간 지역 인재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자 지역민들의 정신적 터전이었지만 훼철과 도굴 등 두 번의 큰 아픔을 겪으며 사라지고 지금은 서원터만 남아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고, 훼철 당시 서원 동쪽 댓대에 위패와 제기 등 유물을 매안(埋安)했으나 모두 도굴당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번씩 제향을 했으나 지금은 중단됐다. 지난 2022년, 댓대 주변의 석축과 기단을 정비하고 관리하고 있다. 마을의 큰 유산인 만큼 원형대로 복원해 교육기관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민들의 바람이다. 마을 입구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160여 년의 느티나무도 마을의 큰 자산이다. 매년 음력 섣달 보름날 밤에 동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중단됐다.

 

마을 옆 고불봉, 영덕팔경 꼽혀
190m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산림청 ‘전국 명품길 60’에 선정
2023년 행복마을 시범사업 운영
유교문화·명산·명품길 적극 활용 추진

 

마을 옆 고불봉(235m)은 작지만 기품이 있는 산이다. 풍수가들은 영덕 화림산의 한 지맥이 달려 내려와 무둔산 자락에서 숨을 고르면서 정기를 받아 동쪽으로 달려가 고불봉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해에서 떠오른 둥근 달이 고불봉에 걸쳐지면 달도 둥글고 봉우리도 둥글다고 해 망월봉으로도 부른다. 동해바다 깊숙이 숨겨져 있던 붉은 태양이 떠오를 무렵 붉은 비단같은 새벽 구름이 고불봉을 감싼 모습을 ‘불봉조운’(佛峰朝雲)이라 부르며 영덕팔경 중 하나로 꼽는다.

영덕으로 유배된 고산 윤선도가 고불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고불이란 봉우리 이름이 이상하다 하지만, 여러 봉우리 중 최고로 뛰어 난 봉우리이네. 어디에 쓰일려고 구름, 달 사이로 높이 솟았나. 때가 되면, 홀로 하늘 받들 기둥이 될 것이네’라는 시를 남겼다. 동해바다와 영덕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고불봉 정상에 오르면 윤선도의 시를 새긴, 펼친 책 모양의 시비가 있다. 작지만 명산이라고 부를 만하다.

 

우곡리 메타세쿼이어길에는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어 52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줄지어 서있다.

 

마을에는 명품길도 있다. 영덕 읍내로 들어오는 주진입로에 있는 우곡리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다. 4차로 양쪽과 중앙 분리대에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 52그루가 줄지어 서 있다. 흡사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 거리는 190m로 짧지만 국립수목원과 산림청으로부터 전국 명품 가로수길 60에 선정됐다. 가로수길은 사계절 얼굴을 바꾼다. 봄은 신록이고 여름은 진한 푸르름이다. 가을에는 황금빛 단풍과 보랏빛 맥문동이 조화를 이룬다. 겨울에는 나목이 되어 미끈한 자태를 뽐낸다.

해파랑길과 외씨버선길 등 마을을 지나는 2개의 걷기 여행길도 사랑받는 명품길이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가는 750km의 길이다. 해파랑길 20코스는 영덕 블루로드 A코스와 겹친다. 강구에서 고불봉을 거쳐 풍력발전단지로 이어지는 17.5km 구간으로 빛과 바람의 길로 불린다. 잠시 해안을 벗어나 산등성을 걷는 구간으로 동해의 푸른 바다와 진한 솔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고불봉에서는 아침에는 일출, 저녁에는 일몰을 볼 수 있다.

 

포항에서 강원 동해를 연결하는 동해선이 연말 개통을 앞두고 있다. 포항~영덕 구간은 2018년에 개통됐고 영덕역이 우곡리에 있다.

 

외씨버선길은 청송과 영양, 봉화, 영월 등 4개 군이 모여 만든 걷기 여행길이다. 길 모양이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과 닮았다고 하여 외씨버선길로 이름 지었다. 2012년 4색 13길로 총 연장 246km 구간이 개통됐고, 2022년에 복사꽃향기길로 불리는 29.5km의 영덕 구간으로 확장됐다. 고불봉에서 블루로드와 만난다. 영덕 구간이 연결되면서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길로 발전됐다. 포항에서 강원 동해를 연결하는 동해선이 계획수립 후 80여 년 만인 올해 말 개통된다. 포항~영덕 구간은 2018년에 개통됐고, 우곡리에 영덕역이 설치됐다.

우곡리는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의 ‘알랭 들롱’으로 불렸던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해 ‘맨발의 청춘’을 비롯 마지막 작품인 ‘야관문: 욕망의 꽃’까지 52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명연기로 인기를 누리던 그는 정계에 진출해 16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있는 수령 160여년의 느티나무.

 

우곡리는 지난해 ‘행복마을만들기 시범마을’로 지정되면서 남강서원으로 대표되는 유교문화와 명산, 명품길, 유명인의 스토리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명품마을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행복마을만들기’는 새 생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행복한 삶을 위해 심신을 수련하고 대화를 통하여 소통과 화합을 추구하는 사업이다. 우곡리에서는 이를 위해 노래와 율동이 있는 행복교실과 대화를 통해 행복마을을 만들어가는 실천교실, 건강과 일상을 함께하는 특별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에어로빅과 요가, 기체조로 건강을 다지고, 대화를 통하여 배려와 사랑을 나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마을의 모습은 점진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마을회관에서의 일상이던 화투놀이는 건강교실로 바뀌었고, 자식자랑·돈자랑은 감사와 배려를 담은 대화로 바뀌었다. 마을 주민들은 ‘항상행복’과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으로 행복한 명품 마을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

<이강석기자·홍상철 수필가>

 

 

[우리 마을은]

 

김진병 우곡리 이장

 

김진병 이장 “남강서원 복원, 관광자원 활용 바람”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예의 바르고 인정이 많은 마을이었습니다. 이런 마을의 전통은 남강서원을 중심으로 300여 년을 이어온 유생의 선비정신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진병 이장은 우곡리 마을을 이렇게 정의한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생활하고, 항상 남을 배려하는 선비정신이 오랜 세월 동안 마을 곳곳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남강서원은 없어졌지만 그 정신만은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행복마을만들기 사업도 그 일환이다. 마을의 큰 유산인 남강서원을 복원해 교육기관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주민들의 바람이다.

김 이장은 2022년에 마을 주민들의 추대로 이장직을 맡아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마을 진입로를 정비하고 보호수 옆에 정자를 건립해 어르신들의 휴식공간을 활용하게 했다. 특히 협소한 마을 안길 배수로를 정비해 유조차량이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유조차에서 가정으로 바로 연료를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편리해졌다. 현재는 도시가스 공급과 산사태 위험지구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는 행복마을 만들기사업을 더욱 활성화시켜 모든 주민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도시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지역에 현장 상황에 맞는 도시계획을 수립·시행하도록 해 주민들이 좀 더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직선 위주의 획일적인 도로망이 아니라 현재의 도로망을 확장해 예전 골목길에 대한 추억은 그대로 살리면서 소방차 등 응급차량은 쉽게 오고 갈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가볼만한 곳]

 

신돌석장군기념관

 

◇신돌석장군 유적지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장군은 1878년 영덕군 축산면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태호, 아명이 돌석이었다. 용맹과 기백이 뛰어나 1896년 경기도의 김하락 의병부대가 영덕으로 이동해 오자 18세의 어린 나이에 참전했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이듬해인 1906년에 영해지역 청년들을 모아 영릉의진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2년 8개월 동안 영덕, 청송, 영양, 울진, 삼척, 강릉 지역을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일본군들은 장군을 태백산 호랑이로 부르며 두려워했다. 1908년 일단 영릉의진을 해산하고 활동지역을 만주로 옮길 계획을 하던 중 일본군 앞잡이에 의해 살해됐다. 장군은 30년의 짧은 생애 중에서 12년을 의병활동에 바치는 등 오직 민족을 위해 살았다. 이에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했고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국가보훈부와 영덕군에서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1996년 신돌석장군유적지를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