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서상길 청년문화마을] 세월의 흔적과 낭만을 간직한 청년들 ‘꿈의 공간’
과거 주요 관공서 밀집한 중심지
경산 최초 아스팔트길 깔린 번화가
관공서·25번 국도 이전으로 낙후돼
2018년부터 ‘도시재생 뉴딜’ 진행
서상길 청년문화마을협의체 구성
꼬불꼬불하고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 서상길의 풍경은 정겹다. 마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1980년대에 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골목 사이사이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벽화들도 반겨준다. 담벼락마다 그려진 벽화를 찾는 재미에 마을을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스며들면 깃들고 깃들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집은 여전히 이곳을 지키는 사람 덕분에 사라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서상길 청년마을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산시 서상동, 삼남동, 중방동에 위치해있다. 2018년 지정된 도시재생뉴딜 사업지구를 기준으로 보면 남부동, 서상동, 삼남동 일부와 중앙동의 삼북동 일부 등 사업지구의 대부분이 서상길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통칭해 편의상 서상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 경산시와 청도군 사이 구도로(국도 25호선)가 지나가는 서상길은 경산읍 사무소, 등기소, 경찰서, 보건소, 농촌지도소 등 주요 관공서들이 위치한 경산의 행정 중심지였다. 1950년도에 찍힌 위성 사진을 보면 서상길 주변에만 주택들이 밀집해있고 주위에는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약 700m에 이르는 서상길 포장도로가 경산 최초의 아스팔트 길이었다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경산에서 가장 번화했던 서상길은 1989년 경산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대부분의 관공서가 이전하고 25번 국도가 이전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떠나며 낙후 지역이 되어갔다. 그렇게 마을은 1980년에 머문 채 기나긴 세월을 흘려보냈다.
삭막해진 마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건 ‘도시재생’이다.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청년인구의 유입을 목표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진행했다. 청년 창업을 위한 공간과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인프라를 마련하고 생활편의시설 확충을 목표로 서상길 청년문화마을협의체가 구성됐다.
시작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민 편의 거점시설 조성을 위해 필요한 부지 매입이 원활하지 않았다. 계획 당시 동의를 했던 토지주들이 선정 후 여러 가지의 이유로 토지매입을 거부하면서 대체부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또 과거부터 이곳을 지켜오며 살아오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노인층이라 마을 운영을 돕는 일이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해 일부 반대를 하기도 했다.
주택마다 도시가스 공급 우선 추진
쌈지공원·연당지테마공원 조성
시·그림으로 발길 잡는 벽화골목
근대한옥 고쳐 마을카페 ‘청년가’
‘웹툰창작소’ 내달부터 운영 돌입
‘주민들의 일상에서 도움이 되는 마을의 변화는 무엇일까?’ 마을협의체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인근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서상길 주변에 도시가스가 유입된 주택은 거의 없었다. 고령의 주민들은 자식들의 걱정에도 높은 연료비가 걱정되어 추운 겨울 연탄을 이용해 추위를 이겨내던 실정이었다.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우선적으로 도시가스 공급에 힘을 쏟았다.
협의체의 노력으로 이제는 대문 앞에 도시가스 배관이 없는 집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도시가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마을협의체와 중간 지원조직들이 주민들과 계속해서 소통의 과정을 거치자 사업은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주민들을 위한 4개의 쌈지공원도 조성됐다. 건물 사이 자투리땅에 조성한 공원이라는 뜻의 쌈지공원이 마을 곳곳에 생기면서 집에서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됐다. 또한 공원이 생기자 주변 쓰레기 투기율도 줄었다.
1960년도에는 장어가 살았던 연당지 연못도 300평 규모의 테마공원으로 변신했다. 개인 사유지였던 연당지는 땅주인이 세상을 떠나고 관리가 되지 않자 잡초가 무성해지고 쓰레기가 쌓였다. 재생사업이 시작되고 땅 주인을 어렵게 찾아 허락을 받은 후 예전 모습의 연못을 모티브로 작은 수변공간을 만들었으며 정자, 포토존이 조성됐다. 마을 거점시설인 어울림 센터 바로 옆이라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마을 곳곳을 둘러보며 남천에 가까워지자 알록달록한 파스텔톤의 벽화가 반긴다. 비좁은 골목길, 낮은 건물 외벽, 촘촘한 지붕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 다채롭게 그려져있다. 마을 전체가 아니라 군데군데 벽화가 그려져 있어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남천 바로 앞에는 ‘시가 있는 서상 벽화골목’도 있다. 벽 전체에 경산에서 활동하는 문인 작가들의 시와 그림으로 채워져있다. 50편 이상의 시를 따라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니 절로 마음속 낭만이 차오르는 듯하다.
10월 중순부터 전통한옥과 일본식 적산가옥의 건축 형식을 혼용해 지은 안부자댁이 리모델링을 마치고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쉴 수 있는 마을 카페 ‘청년가(家)’로 운영된다. 청년가 건물은 경산에 많이 살던 순흥안씨의 여러 집 중 하나로 리모델링 과정에서 근대한옥으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경상북도 등록문화재 지정신청도 준비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어울림센터에서 진행된 바리스타 교육을 통해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자 연습하고 있다.
걷다보면 주변의 건물과 다르게 파란색 페인트가 깔끔하게 칠해진 집이 눈에 띈다. ‘주거환경 개선사업’ 문패가 붙어 있는 이곳은 사실 학생들의 손길이 묻어있는 집이다. 낡은 주택 15곳을 대구한의대 실내디자인 전공 대학생들이 화장실 개선, 전기 보수, 가구 제작 등을 집 수리를 통해 어르신들의 불편한 부분을 해소했다. 안전한 생활환경이 필요한 어르신들에게는 편리함을 선물하고, 청년들에게는 보람찬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뒀다.
변화된 마을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마을 골목에는 카페와 트렌디한 상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마을을 지키던 건물의 모습은 유지한 채 청년 각자의 감성으로 새롭게 꾸며낸 상점들이 많아지자 주민들도 가게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자 매일 집 앞을 쓸고 닦으며 깨끗한 마을 만들기에 동참한다.
올해 4월 도시재생 사업이 마무리됐지만, 마을은 청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합치고 있다. 야구 만화 독고탁을 탄생시킨 고 이상무 화백 전시관과 지역 청년작가를 위한 웹툰 아카데미가 열릴 ‘경산웹툰창작소’가 어울림센터 인근에 완공되어 11월부터 운영된다. 최근 웹툰 강국으로 떠오르는 대한민국의 작가들이 경산시로 모여들면서 마을은 ‘빛나는 만화마을’로 재탄생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을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노후화된 주거단지, 조용해진 상권, 노령화된 주민들. 활기를 잃어가던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힘을 합친다면 일상에 즐거움을 만들 수 있다. 무관심하게 버려져 있던 우물, 오래된 이발소가 도시재생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듯, 이제 서상길 청년문화마을은 청년들의 만화적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꿈의 공간으로 아름답게 그려진 채 새로운 연재를 앞두고 있다.
<김주오·김민주기자>
[우리 마을은]
장명수 이사장 “도심 속 정원같은 마을 만들 것”
마을의 토박이인 서상길 청년문화마을 장명수 이사장은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2019년부터 6년째 이사장을 맡고 있다.
마을 가까운 곳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장 이사장은 24시간이 모자란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오히려 자영업자라 본인의 시간을 쪼개서 마을 발전에 힘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웃는다.
“저와 주민협의체는 지원센터와 주민들 사이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는 게 주된 업무입니다. 주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잘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죠. 처음에는 다들 도시재생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주민들이 변하지 않으면 마을도 변하지 않거든요. 주민들에게 도시재생이 무엇인지를 알려드리기 위해 축제를 열고 홍보도 하며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2019년 2월, 이사장이 되고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집을 방문하면 실내지만 입김이 나오는 얼음골 같은 집에 어르신들이 계셨다. “적어도 이사장을 맡는 동안 우리 동네에 도시가스를 꼭 공급하자는 생각으로 지원센터와 시에 주민들의 의견을 열심히 전달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다들 따뜻하고 안전하게 지내시죠. 크고 거창한 것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마을의 분위기가 잘 단합될 수 있도록 작은 것부터 변화한 것이 지금의 마을을 만든 것 같아요”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보안등을 마을 곳곳에 배치하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보행자 우선도로를 만들며 마을은 점차 안전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변화했다.
마을을 찾는 청년들도 많아졌다. 장 이사장과 서상길 협동조합은 이제 만화마을로 재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닦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 경산웹툰창작소가 개관하니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웹툰을 배우기 위해 마을을 찾은 청년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청년 셰어하우스를 조성해 타지에서 온 청년들이 큰 걱정 없이 마을에서 머물며 좋은 웹툰 작가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또 우리 마을에는 깨끗한 남천이 흐르고 있어 청년들에게 유행인 러닝을 뛰기에도 좋죠. 남천을 기준으로 딱 우리 서상길 쪽만 아파트가 없어서 강물과 자연이 시원하게 조화된 풍경을 볼 수 있어요. 도심 속의 정원처럼 마을을 꾸며보고 싶습니다”
[가볼만한 곳]
◇ 경산이발테마관·중앙이용원…20세기 후반 이발소 모습 보존
중앙이용원은 1956년에 세워져 2014년까지 실제로 이발소로 운영됐다. 이발, 면도를 할 수 있었던 이발소는 두발 자유화, 미용실 증가로 2014년 폐업했다.
경산시가 원도심지였던 서상동 골목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중앙이용원과 인근 부지를 매입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전시하여 20세기 후반 우리나라 이발소의 모습을 잘 간직한 경산 이발테마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내부에는 마네킹으로 이발하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2014년 폐업 당시 주인이 쓰고 있던 이발 의자, 난로와 주전자, 이발 가위, 장기판 등 비품이 그대로 남아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