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인접한 진주 강씨 집성촌
학문을 사랑하는 문중의 가풍
두차례 걸쳐 3형제가 과거 급제
강직한 성품에 권력자 미움 사

 

낙동강과 접하고 있는 금포마을은 마을 앞 강변에 검은 바위가 있어서 금포라 불린다.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수박과 애호박,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양반은 최상위 계급이었다. 군역이 면제되는 등 많은 혜택을 누렸다. 반면에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해야 했다.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조건 중의 하나가 과거 급제였다. 4대 내에 과거 급제자가 있어야 했다. 또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과거급제라 양반들은 평생을 과거시험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그러나 과거급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의 난이도와 경쟁률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매달려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선발인원이 많지 않았다. 생원진사시로 불리는 사마시에서는 3년에 한 번 200명을 선발했다. 그마저도 한양 출신들이 4할 정도를 차지했다. 지방에서 과거급제는 하늘의 별을 따는 만큼 어려웠다. 과거 급제는 가문의 영광을 넘어 고을의 영광이었다. 지방에서는 군현당 10년에 한 명도 나오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열망은 나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최연소합격자는 13세의 이건창이었고, 최고령은 85세의 정순교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과거시험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같은 어려운 과거시험에 두 차례에 걸쳐 3형제가 급제한 마을이 있다. 구한말에는 독립유공자를 5명이나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한 곳이다. 문경시 영순면 이목1리 금포마을이다.

 

낙동강 제방인 이목제 건설로 33만㎡의 농지가 만들어졌고, 수해가 없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금포마을은 낙동강을 접하고 있다. 강 건너 예천의 삼강나루와 마주하고 있다. 마을 앞 강변에 검은 바위가 있어서 금포라 불린다. 25가구에 4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25가구 중 23가구가 진주 강씨로 요즘 보기 드문 집성촌이다. 집성촌인 만큼 법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우애가 깊고 인정이 좋은 마을로 소문난 곳이다.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수박과 애호박,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

예전에는 땅콩과 보리를 많이 재배했었으나 낙동강의 잦은 범람으로 피해를 많이 입었다. 낙동강 제방인 이목제 건설로 33만㎡의 농지가 만들어졌고, 수해가 없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운 이목제는 봄이면 벚꽃이 만발해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봄이면 2km에 이르는 이목제에 벚꽃이 만발해 낙동강의 푸른 물결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강씨 집성촌인 만큼 문중에서 두 차례에 걸쳐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고 5명의 독립유공자가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큰 마을이다.

진주 강씨는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모신다. 후대에 5파로 분파가 됐다. 금포의 진주 강씨는 박사공 강계용을 파조로 한다. 파조의 12세손 강응청은 아들 9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출사하고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아들 중 3남 강주와 4남 강제, 7남 강립 등 3형제가 과거에 급제했다. 강주는 임진왜란 때 창의해 지방의 향병을 모집하는 소모관으로 보국했고, 강제는 이조정랑을 역임했다. 강립은 향교 교관인 훈도로 후학을 양성했다.

15세손인 강술선, 강복선, 강상선 3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해 삼인(三仁)이란 칭호를 받았다. 강술선은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과에 급제한 강복선은 정언과 진산군수, 양산군수를 지냈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강상선은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해 고성군수와 정선군수를 역임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강술선이 생원일 때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신 문묘에 함부로 오르는 이신(二臣)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권력자들의 미움을 샀다. 동생들도 연좌돼 삼형제는 귀향해 칩거했다. 이 같은 사례로 미루어볼 때 학문을 숭상하는 문중의 가풍과 강직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월 24일, 금포마을에서 강병유지사의 국가유공자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강병유·강순필·강병욱·강내영 등
한마을서 독립운동가 5명 배출
유공자 생가 복원·기념관 건립
나라사랑 교육장 활용 등 추진

 

금포마을은 독립유공자가 5명이나 배출된 마을로 애국심도 남다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한마을에 독립유공자가 5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10촌 이내의 친척 중에서 5명이나 배출된 것은 한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금포마을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은 강병유(1858~1921)지사다. 강병유지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귀향해 집안 청년들을 이끌고 문경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이강년의 부대에 합류해 좌종사로 활동했다. 2020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올해 2월 묘소에서 열린 강병유지사 국가유공자 기념비 제막식에는 200여 명이 참석해 강 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이 밖에도 강순필(독립장), 강병욱(애국장), 강내영(건국포장), 강병수(건국포장) 등 4명의 지사가 이강년 부대에 합류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들의 참전기록은 운강 이강년기념관 표식과 독립군부대 편제 조직도에 남아 있다.

 

금주정사는 설월당 강주식이 독서를 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마을회관 바로 옆에 금주정사가 있다. 정5품 통덕랑을 지낸 설월당 강주식이 독서를 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그는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얼굴이 단정하고 덕행과 문장이 세상에서 추앙받았다고 한다. 금주정사는 1700년대 중반에 건립했으나 1925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그 후 1993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수했다. 강주식은 마을에 정착해 글을 짓고 강변에 여러 개의 정자를 지었으나 모두 유실되고 없어 높은 학덕과 재예를 볼 수 없게 된 것을 후손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금포마을 표지석

 

출향인의 애향심도 남다른 마을이다. 금포마을은 낙동강과 접해 있지만 외부와 고립되다시피 한 오지마을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산에 가려 마을이 있는지도 모르는 마을이었다. 마을로 통하는 큰고개길은 오솔길이라 사람은 걷고 물건은 소 등짐으로 날랐다. 환자라도 생기면 가마에 태우고 점촌에 있는 병원까지 가야 했다.

재일동포인 강수원, 강수근 형제는 1970년대 초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으로 마을을 찾았었다. 고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통로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큰고개길을 넓혔다. 좁았던 고갯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넓혀져 외부와 왕래하는 길이 열렸다. 형제는 낙동강변에 양수장을 설치하고 농수로를 만들었다. 강변의 갯벌은 옥토로 변했다. 마을 길이 열리고 옥토가 펼쳐진 풍요로운 마을로 변모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형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마을에선 강수원·강수근 송덕비를 세웠다.

현재 마을에선 선대의 나라 사랑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독립유공자 마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추진위원회(위원장 강중대)를 구성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국가보훈부와 문경시를 비롯한 관계 기관을 방문해 한 마을에서 5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경위와 그분들의 활동상을 알리면서 독립유공자 마을 건립의 필요성을 건의하고 있다. 관련 사료를 발굴하고 전문 학술연구용역도 추진할 계획이다.

운강 이강년기념관에서도 금포마을 독립유공자를 대상으로 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유공자들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해 교지와 훈포장 등 독립운동 자료를 전시해 나라 사랑의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방문객들을 위해 낙동강과 연계하는 관광코스도 만들 계획이다.

<신승식기자·홍상철수필가>

 

 

[우리 마을은]

 

강대진 이장

 

강대진 이장 “독립운동가마을 조성에 심혈”

금포마을(이목1리) 강대진 이장은 “우리 금포마을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마을”이라면서 “학문을 숭상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대의 높은 뜻을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강 이장은 연탄 유통업을 했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연탄을 소비자들에게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유통시켜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구입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난해 주민들의 추대로 이장직을 맡아 2년째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주민생활에 필요한 행정 정보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주민들에게 알리고 주민들의 건의사항이나 취약계층의 어려운 사항을 행정기관에 전달해 단 한 사람도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강 이장은 독립유공자마을 조성 추진위원회와 손을 맞잡고 독립유공자마을이 조속히 만들어지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마을 앞 제방인 이목제와 낙동강 700리 자전거길을 연결시키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이목제가 자전거길로 연결되면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마을을 찾게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것은 독립유공자마을을 가장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볼만한 곳]

 

주암정

 

◇주암정…석선·정자·연꽃 절묘한 조화

주암정을 바라보는 첫 느낌은 ‘물 위로 배가 지나가는구나.’하는 것이다. 커다란 바위가 바로 배(석선)다. 그 배 위에 날아갈 듯한 정자가 서 있다. 주암정은 ‘주암 채익하’(1573~1615)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1944년에 지었으니 역사는 80년 남짓이지만 지을 당시 인근의 고택을 해체해 그 목재를 이용해 지었다고 하니 정자가 품고 있는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아담한 팔작지붕이다. 남향을 고집하지 않고 금천을 바라보는 북서향으로 지은 것은 경관을 더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 앞 연못에는 홍련이 자라고 뱃머리 부분에는 능소화가 심겨있다. 석선과 정자, 그리고 연꽃과 능소화가 어우러져 절묘한 경관을 연출한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금천을 사이에 두고 경체정이란 정자가 있다. 뒤편 산언덕에는 도천사지가 있다. 도천사지에 있던 통일신라시대 석탑 3기는 김천 직지사에 옮겨져 있다. 정자는 채익하 선생의 10세 종손인 채훈식씨가 관리하고 있다. 기둥에 써 놓은 ‘주인이 없어도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라는 작은 메모가 주인의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한다.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368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