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법전면 늘미마을] 맑은 물·좋은 콩에 정성 담아 ‘명품醬’ 빚는 사람들
빼어난 경관 자랑하는 산골마을
동네 사람들 추억 담긴 아람옛길
마을 경관 한눈에 보이는 솔밭
언제나 맑은 물 굽이치는 낙동강
장 맛 비결이라는 오래된 우물
별유천지 가는 문 ‘선묘동석문’

인간 생활의 기본이 되는 3대 요소는 ‘의식주(衣食住)’다. 입고 먹고 쉴 공간이 있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첫 번째는 ‘식(食)’일 것이다. 옷과 집은 부족하거나 없으면 불편하고 힘이 들지만 먹을 것이 없으면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의 식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장(醬, 간장·된장)이다. 장이 없는 우리의 밥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장(醬)이 우리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사례가 ‘선조실록’에 나온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몽진에 나섰다. 새벽에 한양을 떠나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왕과 왕비는 몇 가지 반찬을 준비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의주에서도 큰 고통을 겪은 선조는 5년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또다시 몽진을 준비했다. 형세가 견고하고 명나라와 가까운 영변이 적합하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준비 책임자로 신잡이 천거됐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형이다. 비변사 당상으로 일하던 신잡에게 합장사(合醬使, 임금의 장을 담그는 관리)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미리 영변에 가서 장을 담그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좌부승지 한준겸이 신(申)씨 성이 장 담그기를 꺼리는 신일(辛日)과 음이 비슷하니 장이 시어지고 매워질 것이라고 반대해 합장사 파견은 무산됐다. 이를 두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임금이 난리가 났는데 나라를 지킬 생각은 않고 된장부터 챙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식생활에서 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할머니들의 옛날 솜씨로 장을 담아 마을을 바꾸어 나가고 있는 마을이 있다. 봉화군 법전면 늘미마을(눌산1리)이야기다.
눌산1리는 월암산(608m)자락 해발 4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산골마을이다. 늘미(눌미)와 정수암, 멀골, 고늘미, 새터, 마그네, 갈골 등 일곱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은 늘미마을이다. 동북쪽 300m 지점에 정수암마을이 있고, 늘미에서 멀리 떨어진 있다고 하는 멀골(원곡)이 있다. 깊은 골이 있다는 고늘미에서는 3백 년 된 왕버들나무에서 음력 1월 14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사를 지낸다. 새터는 첫 마을인 감보개 마을 사람들이 터전을 옮겨와 살았다고 하여 신기(新基)라고 부른다. 두천, 농천으로 불리는 마그네는 ‘맑은 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마을이다. 갈골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 마을로 경관이 아름답다. 목마른 말이 하천에서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는 ‘갈마음수형’의 명당터가 있다고 전해온다.

마을에서 경관이 아름다운 5곳이 늘미 5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1경인 아람옛길은 늘미마을에서 낙동강 상류 아람마을까지 이어지는 5km의 길이다. 예전부터 주민들이 들일이나 산에 땔감을 하러 갈 때, 학교를 갈 때 다니던 추억이 깃든 길이다.
제2경 멀골솔밭은 낙동강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오는 솔밭이다.

제3경은 낙동강이다. 언제나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품고 굽이친다. 제4경은 마을 우물이다.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 오래된 샘물로 향나무 아래에 언제나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난다. 늘미마을 된장이 맛있는 이유도 이 샘물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제5경은 석문이다. 낙동강 상류에 기암괴석이 줄지어 있다. 큰 바위에 선묘동석문(先墓洞石門)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석문을 들어서면 선경(仙境)이다. 이 석문이 별유천지로 들어가는 문이다.

옛 솜씨 그대로 장 담는 마을
직접 키운 토종 황금콩 잘 골라
좋은 소금·지하 200m 암반수로
1년을 꼬박 정성들여 담은 장
염도·발효·숙성 과정 ‘규격화’
일관된 맛으로 재구매 이어져
늘미마을의 명물은 된장이다. 늘미마을 된장이 명성이 높은 것은 된장에 필요한 4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좋은 콩과 맑은 물, 깨끗한 환경,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의 정성이다. 2015년부터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체험객 유치를 위해 빵과 피자체험을 하고 카페도 열었다. 농촌에 점심을 배달하는 들녘밥상도 만들었다. 그러나 기술과 운영 모두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의견을 모았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자’, 이렇게 해서 찾은 것이 된장이었다. 예전부터 늘미마을의 된장은 맛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 전통을 이어가자고 했다.

된장의 기본은 콩과 소금, 물이다. 마을에서 직접 생산한 토종 황금콩을 잘 골라 깨끗이 세척 후 대형 가마솥에서 아홉 시간 동안 삶고 뜸을 들인다. 영양성분과 약성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콩은 물에 불려 증기로 찌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삶는 방식을 고집한다. 삶을 때는 불 조절이 관건이다. 화력이 너무 세도 안되지만 약해도 안 된다. 그만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삶고 뜸을 들이는 과정에서 콩에서 빠져나온 영양성분과 약성이 콩에 재흡수돼 메주에 고스란히 담긴다. 삶은 콩은 45℃ 정도로 식힌 후 발효 과정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굵게 찧어 메주로 만든다. 성형을 한 메주는 24시간 겉말림을 한 후 온돌방에서 50일 정도 2차 건조를 한다. 바닥에 훈증 소독을 한 볏짚을 깔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이때 건조와 발효가 일어난다. 마을에서는 콩을 삶기 전에 맛있는 된장이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장은 음력 정월 ‘말날’에 담근다. 먼저 주문 제작한 숨쉬는 항아리 안에 짚불을 태워 소독하고 물로 세척 한다. 장을 담그는 물은 지하 200m의 암반수를 사용한다. 소금은 항아리에서 1년 동안 보관하면서 간수를 뺀 물기없이 포슬포슬한 천일염을 사용한다.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인 염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과 소금의 무게를 정확히 계량해서 18.5%로 맞춘다. 달걀이나 염도계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무게로 계량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소금물은 메주의 4배를 넣는다. 고추와 대추, 숯을 넣고 메주가 소금물에 완전히 잠기도록 한다.
장을 담근 후 60일이 지나면 된장과 간장을 분리해(장가르기)항아리에 넣고 1년 동안 숙성시켜 판매한다. 항아리는 햇볕이 잘드는 야외에 보관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행주로 닦아준다. 숨 쉬는 항아리라 안에서 배어 나오는 소금기도 닦아내고 외부의 이물질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항아리를 덮은 광목 보자기(장보)도 수시로 교체한다. 이렇게 완성된 늘미마을 된장은 ‘옛날 된장 그대로의 맛이고 맛이 달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이 만든 된장을 원하는 고객을 위한 된장은행도 운영한다. 정월 장담그기 행사에 참여해 직접 장을 담그고 완성된 된장은 된장은행에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가져갈 수 있다. 그동안 마을에서 철저하게 관리한다.
오직 콩과 소금, 물만을 사용해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만 염도와 발효, 숙성 과정은 규격화해 맛의 일관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 늘미마을 된장의 인기비결이다.이렇게 정성들여 만들고 관리하는 된장의 맛을 한번 본 고객들의 재구매가 이어져 권혁진 사무장은 “늘미마을 된장을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고 자랑한다.
김교윤기자·홍상철 수필가
<우리 마을은>

이창기 이장 “좋은 농산물이 제값 받을 수 있는 기반 마련할 것”
“우리 마을은 산골이라 일곱 개의 자연부락으로 흩어져 있지만 단합이 잘되고 사람들의 성품이 온화한 평온한 마을입니다. 요즘은 된장이 구심점이 되어 더욱더 화합하고 소통하는 마을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이창기 눌산1리 이장은 마을 자랑을 늘어놓는다. 눌산 1리는 여러 개의 자연부락이 산재해 있는 산간 오지마을이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주민들이 모두 한 사람의 마음같이 뭉쳐서 해결해 나가는 마을이다. 겨울철 눈이 올 때 제설작업이 대표적이다. 눈이 내리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트랙터를 몰고 나오고, 눈가래(넉가래)를 들고 모여든다. 해마다 겨울이면 몇차례나 있는 일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이 이장은 대학을 졸업 후 서울에서 웨딩업을 운영하다가 30년 전에 귀향해 농사를 짓는다. 처음에는 담배를 재배하다가 이제는 수박과 고추를 주로 재배한다. 친환경 감자와 브로콜리, 고구마도 재배해 학교급식에 납품하고 임산부 꾸러미도 취급한다.
8년 이장직을 맡으면서 마을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기반 정비에 나섰다. 농산물을 안전하게 운반해 공판장에 출하시 제값을 받도록 하기 위해 울퉁불퉁한 비포장 농로부터 포장했다.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해도 운반 과정에 발생한 상처로 인해 헐값에 팔리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위험한 축대와 담장을 정비해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도 힘썼다. 앞으로도 주민들의 생활편의를 위해 자연부락별로 필요한 기반 정비사업을 계속 발굴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추진할 예정이다.
현재 추진 중인 메주 발효실 추가 설치사업을 빨리 마무리해 된장사업이 더욱 확대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주민들의 고령화에 따라 된장사업이 위축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청년 창농들이 마을로 들어와 늘미된장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강구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마을에 고향형 요양시설을 마련해 평생을 이 마을에서 보낸 어르신들이 마을에 있는 내집같은 요양시설에서 아름답고 평온한 삶을 마감하는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홍상철 수필가
<가볼만한 곳>

◇사미정과 사미정계곡…옛 선비들의 풍류를 즐겨볼까
봉화는 정자와 누각의 보고다. 정자와 누각이 103동이나 있다. 봉화군에서는 이 같은 누정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보전하기 위해 ‘봉화정자생활문화관’을 건립해 운영 중이다. 빼어난 경관을 배경으로 건립된 누각이나 정자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사미정’과 ‘사미정계곡’이다.
태백산과 구룡산 문수산에서 발원한 운곡천 물줄기가 춘양 읍내를 지나면 사미정 계곡에 이른다. 사미정 계곡은 굽이치는 계곡을 따라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길을 끼고 있는 너럭바위는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사미정 계곡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곳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바로 사미정이다. 굽이치는 계곡과 넓은 너럭바위,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진 정자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조선 영조 때 옥천 조덕린이 건립했다. 정면3칸, 측면2칸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있고 앞면과 양측면에 툇마루가 있다. 사미정이란 현판은 정조 때 재상 채제공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사미정 계곡은 봉화 5대 계곡 중의 하나로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