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암곡마을] 철마다 다른 매력 뽐내는 古都 경주의 ‘숨은 보석’
주민 힘모아 가꾼 아름다운 마을
도로 잘 닦여 접근성도 좋은 지역
숨은 벚꽃명소로 봄마다 북적
가을이면 억새 보러 긴 차량 행렬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역사 유적이 많다. 그렇다고 과거에만 얽매여 있는 고리타분한 곳은 아니다. 젊은 감각을 반영한 카페와 맛집, 트렌디한 관광지가 더해져 몇번을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보문단지에서 차로 5km 남짓 달리면 닿는 암곡마을 역시 경주의 매력을 더해주는 숨은 명소다. 덕동호 상류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봄에는 벚꽃, 가을이면 억새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여기에 최근 해바라기가 더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

암곡마을은 1970년대 후반 덕동댐 건설로 옛 마을이 물에 잠기며 상류인 지금의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경주시 보덕동에 속한 계정(10통), 와동(11통), 왕산(12통) 세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이름인 ‘암곡(暗谷)’은 토함산에서 올린 봉화가 보이지 않을 만큼 골짜기가 깊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만큼 과거엔 외지고 접근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마을 앞까지 도로가 잘 닦여 접근성이 좋다. 덕동호 순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좋아 마을 앞을 지나는 차들도 많다.

봄이면 마을 앞 도로에 300m에 이르는 벚꽃터널이 특별한 풍경을 선사한다. 경주에서 가장 늦게까지 벚꽃을 볼 수 있는 암곡마을은 티맵과 카카오맵에 경주 숨은 벚꽃명소로 뜨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과 사진작가들이 마을을 찾는다. 올 봄에는 ‘제1회 암곡와동 벚꽃축제’를 개최해 포토존도 만들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주민들이 주차관리 당번을 정해 마을을 찾는 이들의 불편을 최소화 했다.
가을이면 동대봉산 무장봉 억새를 보기 위한 차량행렬로 마을 앞 도로가 다시 북적거린다. 봄,가을과는 달리 마을은 여름이면 조용해진다. ‘여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게 만들 수는 없을까’하는 주민들의 바람은 해바라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 봄, 와동마을 맹영선 통장은 튤립축제를 보기 위해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튤립보다 다양한 종류의 해바라기였다. 해바라기하면 노란색만 생각했는데 색깔도 크기도 다양한 해바라기들이 신기했다. ‘우리 마을에 심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9종류의 씨앗을 사왔다. 어떤 종류의 해바라기가 잘 자라는지 시험삼아 자신의 집 앞 800평의 땅에 조성한 해바라기밭에 별다른 홍보도 없이 입소문만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바위에 해바라기와 고양이를 모티브로 그림도 그리고 꽃밭 근처 버섯재배사에도 벽화를 그려 포토존도 만들었다.
작년에 만든 해바라기 밭 큰 인기
마을 곳곳 5천평 땅 개간·파종
당장 수익은 없어도 관광객 위해
예쁜 벽화 그리고 촬영 소품 대여도
가능성을 확인한 마을 주민들은 올해는 주민공동체사업으로 경주시에서 받은 지원금과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금액을 보태 규모를 좀 더 키웠다. 마을 곳곳에 약 5천 평의 땅을 확보해 해바라기를 심었다.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고라니가 나타나던 땅을 굴삭기와 트랙터를 동원해 개간하는데만 1주일이 걸렸다.

4월에 첫 파종을 하고 7월초 부터 개화가 시작됐다. 보통 개화후 2~3주 정도 피어있는 해바라기의 개화 시기를 조절해 10월까지 차례로 꽃이 피도록 구획을 나눠 관리를 한다.

해바라기꽃밭 한켠에는 30년이 넘은 오래된 트랙터를 세워뒀다. 그 위에 올라서면 넓게 펼쳐진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좋다. 석양무렵에는 더욱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맹 통장의 딸이 친구와 함께 그린 그림이 반응이 좋아 올해는 영남대 교환학생동아리 친구들까지 가세해 마을에 벽화를 그렸다.

해바라기꽃밭을 조성하고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일이 귀찮을 법도 한데 주민들은 세심하게 손님맞이 준비를 한다. 그늘이 없는 해바라기꽃밭 옆에 천막을 치고 그 아래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두었다.

해바라기 조화와 선글라스 등 소품도 무료로 대여해준다. 오며가며 들르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어우러진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다.

암곡마을은 3개의 통에 220여세대 5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주민들은 사과와 벼농사, 고추·옥수수·들깨 등의 밭농사를 주로 한다. 해발200m의 고지대에서 생산되는 암곡사과는 이름만으로도 믿고 구입할 정도로 유명하다. 오랜 고정고객들이 많아 직거래로 80%이상이 소비된다. 최근에는 무농약 친환경으로 재배한 동대봉산 미나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주민 대부분은 60·70대라 해바라기밭 조성은 마을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마을의 소멸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해바라기꽃밭을 조성하고 시설을 정비하는 등 마을을 가꿔가는 중심에는 40·50대가 주축이 된 ‘스마트 농민회’가 있다. 이들은 ‘자녀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한다. 마을이 상수도 보호구역이라 개발이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이들은 환경을 해치지 않고도 소멸 위기의 마을을 지켜낼 방법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다.
마을을 찾는 이들이 감탄할 만큼 깨끗한 마을이 유지되는 비결은 주민들이 참여와 협력 덕분이다. 마을 입구에 쓰레기 분리 수거장을 설치해놓으니 거리가 멀어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철저히 지킨다. 방치되어 있던 오폐수 펌프장은 예산을 확보해 정비를 했다. 벚꽃터널 옆에 쉬어갈 수 있는 정자도 만들고 작은 공원도 조성했다. 공원의 잔디도 주민들이 직접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정성껏 관리한다.
암곡마을 주민들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라고 요구하기 보다 ‘우리가 할테니 더 잘되게 조금만 도와달라’는 마음가짐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자발적인 주민들의 움직임에 경주시와 보덕동사무소에서도 기꺼이 힘을 보탠다.

암곡마을은 지난 2022년 태풍 힌남노로 경주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하나다. 주택과 차량, 마을 앞 다리, 그리고 간이상수도시설까지 다 떠내려가버렸다. 좌절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이참에 마을을 깨끗하게 조성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풍경의 한켠에는 여전히 복구작업이 계속 되고 있다. 올해 말까지 피해복구가 마무리되면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을을 꽃동산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철마다 벚꽃과 억새, 해바라기가 마을을 아름답게 수놓는 암곡마을은 이제 더이상 ‘어두운 골짜기’(暗谷)가 아니다. ‘내가 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자’라는 주민들의 마음이 모여 희망의 꽃을 피우고 있다.
안영준·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맹영선·이경희 통장 “자녀들이 계속 살 수 있는 마을로”

“우리 아이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10년, 20년 후에도 이 마을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을토박이로 지금껏 마을을 지켜온 경주 암곡마을 맹영선 통장(11통)이 해바라기꽃밭을 가꾸고 마을을 정비하는데 열성인 이유다.
마을의 소멸을 걱정하는 현실에서 누군가 새롭게 마을로 이주해 오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대를 이어 사는 것이 가장 쉬운 해법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여행길에 사온 씨앗 몇 종류를 심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오며가며 본 주민들이 ‘우리도 씨앗 있는데’, ‘모종 좀 줄까’ 하다보니 어느새 일이 커졌습니다.”
맹통장의 아내는 “벚꽃이 만발한 모습에 반해 이 마을로 들어왔는데 25년쯤 이 마을에 살다보니 많은 이들이 그냥 지나쳐 가는게 안타까웠다”며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현실로 이뤄져 요즘은 몸은 힘들어도 행복하다고 한다.
암곡 스마트 농민회장을 겸하고 있는 이경희 통장(10통)은 2013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마트농민회 회원의 대부분이 미혼의 자녀를 두고 있는 만큼 마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크다.
두 마을이 한마을 처럼 가까이 있어 서로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두 사람은 마을의 제일 큰 자랑은 ‘협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들 농사일로 바쁘지만 해바라기 씨 뿌리기, 모종 심기, 풀 뽑기, 그리고 마을 대청소까지 일손이 필요할때면 열일 제치고 시간을 비워둔다.
요즘은 더워지기 전에 일을 끝내려고 새벽 5시에 모여 함께 일을 한다. 마을 어르신은 우리 마을 통장들이 일을 너무 잘한다고 칭찬하고, 통장들은 어르신들이 풀도 뽑아주시고 일손을 많이 보태주시는게 더 감사하다고 서로 공을 돌리기에 바쁘다.
올해 말까지 태풍 피해복구가 끝나면 폐허로 방치되어 있는 공장 부지를 정비해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등 본격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배수경기자
<가볼만한 곳>

◇동대봉산 무장봉
보문단지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동대봉산 무장봉은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람이 찾아가기 힘든 골짜기에 무기와 투구 등을 파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동대봉산 무장봉이라는 이름보다 무장산으로 흔히 불린다. 가을이면 무장봉의 억새를 보기 위해 수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드라마 ‘선덕여왕’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등산로는 완만한 코스와 경사가 제법 있는 2개의 코스로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산자락에 자리잡은 무장사는 신라 제 28대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고 보물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층석탑이 당시의 역사를 간직하며 서 있다.
계곡을 따라 조성된 탐방로 일부 구간에는 맨발걷기길이 조성되어 있어 발에 닿는 흙의 감촉을 느끼며 걸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