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계리서 태어난 이오덕 선생
번역·일본어·한자어 사용 지양
우리글 살리기에 한평생 바쳐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는 평생을 아름다운 우리말 글쓰기 운동을 펼친 이오덕 선생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이오덕 작은 문학관’이 있다. 덕계리는 청송사과의 시배지로도 알려져 있다.

 

‘매년, 모방, 수면, 물의, 성인, 만끽하다, 무산되다’ 별 생각없이 흔히 쓰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해마다, 흉내, 잠, 말썽, 어른, 한껏 맛보다, 깨지다’로 바꿔도 괜찮다. 아동문학가이자 한글학자, 사상가였던 이오덕 선생은 이렇게 번역 말투나 일본어의 흔적이 남아있는 말, 한자어를 섞어 쓰는 말 대신 되도록 우리말을 쓰자고 권했다. ‘입말’보다는 ‘글말’을 더 좋아하고, 쉬운 말보다는 어렵게 쓰는 것이 더 유식해보인다는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썼다.

 

이오덕 작은 문학관은 마을 경로당 한켠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책꽂이에 한권 정도는 꼭 꽂혀있던 책이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와 ‘우리문장 바로쓰기’다. 반드시 읽어야할 책 중 하나로 꼽는 이도 꽤 있다. 평생을 아름다운 우리말 글쓰기 운동을 펼친 이오덕 선생의 고향이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다. 그곳에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이오덕 작은 문학관’이 있다.
예로부터 청송은 경북에서 육지 속의 섬처럼 여겨졌다.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에 있는 노귀재(502m)와 그 골이 워낙 깊어 ‘세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삼자현 고개(522m)가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곳에 터널이 뚫리면서 오지 중의 오지라고 불리던 것은 그야말로 옛말이 되었다. 영천에서 노귀재 터널을 통과해 35번 국도를 따라 줄지어 서있는 사과나무를 벗삼아 15분 남짓 달리면 ‘아동문학의 고장, 사과의 고장’,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 닿는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이 마을을 이롭게 해준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덕계리(德溪里)는 3반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반은 금수골, 2반은 원덕계와 질번디, 3반은 구억들 혹은 구석들이라 부른다. 이중 이오덕 동화마을로 불리는 3반(구억들)에는 30가구 60여명의 주민이 살고있다.

 

마을 곳곳에서 이오덕 선생의 작품을 벽화로 만날 수 있다.

 

1925년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이오덕 선생은 태어난 해에서 오(五)를, 덕계리에서 덕(德)을 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55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아동문학을 시작하고 197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포플러’가,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꿩’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42년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1986년 퇴임 후에도 우리말 연구소를 만들어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썼다.

 

 

이오덕 작은 문학관

 

 

2016년 ‘이오덕 마을’ 공모 선정
경로당 한 켠에 작은 문학관 건립
절판 서적·악보 등 귀중한 자료

 

덕계리에서는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의 ‘창조적마을 만들기’ 공모에 ‘사과의 고장, 문학의 고장-이오덕 마을’로 응모해 본격적으로 이오덕 선생의 뜻을 이어받고 기억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을 경로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이오덕 작은 문학관’은 겉보기에는 이름처럼 작고 소박하다. 그렇지만 내실있게 꾸며진 문학관이 품고있는 뜻은 작지 않다.

 

이오덕 작은문학관 앞에는 선생이 직접 쓴 ‘우리 고향 화목’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문학관 앞에는 선생이 쓴 글 ‘우리 고향 화목’을 새긴 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이 비석은 원래 화목장터 삼거리에 있었으나 오며가며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선생은 ‘화목은 어머니 같은 보현산의 등줄기를 타고 앉았다. 화목은 청송과 영천과 안동과 의성, 그리고 군위와 영일까지 여섯 고을의 고삐를 잡고 우뚝 앉아서 이 나라 사방을 내려다보는 명당이다. 낙동강은 한 줄기 아름다운 근원을 여기에 두었으니 산 곱고 물 맑아 모두 착하고 어질 수 밖에 없다’라고 마을을 설명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현서면이지만 대부분의 청송사람들은 이곳을 ‘화목’이라고 부른다. 선생의 후손이 경로당 부지로 기증한 땅 옆으로 따로 땅을 더 매입해 경로당과 문학관을 한 건물에 두었다. 덕분에 문학관에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나가다 이정표를 보고 우연히 들른 이들도 있지만 글쓰는 이나 교사들은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이오덕 작은문학관에는 선생이 직접 쓴 책과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문학관을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건물은 지었지만 전시관 내부를 꾸미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습도, 온도 조절을 위한 설계를 하는데만도 큰 돈이 필요했다. 결국 예산에 맞춰 설계를 했다. 내부는 선생의 육필원고와 책, 영상들로 채웠다. 절판된 책이 많아 전국의 고서점을 뒤졌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회장인 이주영박사와 당시 추진위원장이던 박효일 씨가 소장하고있던 자료들과 책을 기꺼이 내놓았다.

손글씨로 된 책 ‘우리말 우리글’, 이원수 선생의 동시에 직접 작곡한 노래악보 등 귀한 자료도 많다. 따로 책꽂이에 꽂힌 책은 선생의 아들 이정우씨가 보내와 이곳을 찾는 이들이 한권 씩 갖고 갈 수 있도록 했다.

 

마을 골목길에서 선생의 작품인 ‘포플러 나무’와 ‘염소’를 벽화로 만날 수 있다.

 

마을 곳곳에는 선생의 작품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선생이 집에서 키우던 염소를 몰고 길안천으로 다니던 추억을 담은 ‘염소’와 ‘포플러’도 벽화로 만날 수 있다. 길 건너 체육관 벽에도 ‘그리운 선생님 이오덕’이라는 글귀와 함께 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있다.

 

마을 건너편 체육관에도 이오덕 선생을 기리는 벽화가 그려져있다.

 

주민들 한글 배워 책 출판까지
마을 곳곳 선생 작품 주제 벽화
권정생 선생과 우정의 흔적도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도 크다. 선생의 ‘우리말 바로쓰기’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주민들은 한글을 배우고 글을 썼다. ‘행복 청송’과 ‘덕계리 사람들’이라는 책도 펴냈다. 책 속에는 ‘중학교는 못 했니더’, ‘술 좋아하던 남편’, ‘고맙다 점숙아, 참고 잘 살았다’ 등 마을 어르신들의 삶이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담겨있다.

 

마을 곳곳에서 이오덕 선생의 작품을 벽화로 만날 수 있다.

 

마을에서는 이오덕 선생과 ‘강아지똥’,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의 12살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의 흔적도 만날 수 있다. 권정생은 1946년 외가가 있던 댓골에서 2년여를 살았다. 댓골마을은 안동 일직마을과 함께 그의 동화 ‘몽실언니’의 무대가 된 마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으로 첫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권 선생의 신춘문예 당선소식을 듣고 이오덕 선생이 안동으로 그를 찾아가며 다시 시작된 인연은 30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쭈욱 이어졌다. 마을에 ‘몽실언니’ 벽화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 건물 벽에는 사과나무를 처음 들여온 박치환 선생과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그려져 있다.

 

덕계리에는 또 한 명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농촌계몽가인 박치환 선생이다. 선생은 의성 비안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이후 일본을 거쳐 1924년 귀국을 하면서 사과(국광)나무 10그루를 갖고 와서 이곳에 심었다. 이것이 청송사과의 효시로 여겨진다.

 

 

청송사과

 

청송사과는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10년 연속 수상할 정도로 명품사과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가 만 100주년이 되는 해라 더 의미가 깊다.

“어려운 말 하는 사람 믿지 않고/ 유식한 글 쓰는 사람 따르지 않고/ 쉬운 말 우리 말로 살아가는 사람/ 바르고 깨끗하고 아름다워라” (이오덕 ‘우리 말 우리 얼’중) 이오덕 선생의 뜻을 생각해 쉬운 말, 우리 말로 글을 써보려고 애를 썼으나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윤성균·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임형준 이장, 박효일 전 추진위원장.

 

임형준 이장 “청년회 활성화, 마을축제 적극적으로 추진”

 

덕계리에서 태어난 임형준 이장은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대구로 나가 공부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지난 2017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젊은이가 귀하다보니 새마을지도자와 영농회장을 맡아 활동을 하다 얼떨결에 이장까지 맡게 되었다. “이장은 동네를 위해 희생을 하고 일을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장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편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3반으로 나눠져 있지만 이렇게 단합이 잘되고 인심이 좋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 거라고 자부한다.

이왕 이장이 된거 더 체계적으로 해볼 생각으로 올 7월부터는 덕계청년회도 만들었다. 여느 농산어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평균연령이 높으니 청년회라고 해도 65세이하면 가입이 가능하다.

2반 반장은 67세지만 청년회에 가입했다. 청년회를 활성화해 마을 행사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고 마을 어르신들도 더 열심히 섬길 생각이다. 현서면에서 2016년부터 4년간 해마다 열리던 ‘이오덕 문학축제’도 다시 열렸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이오덕 동화마을’에서는 박효일 전 추진위원장도 빠트릴 수 없는 이다. 이오덕 선생과 한 마을 같은 골목에서 태어난 인연이 있다.

20년 가까이 차이가 있으니 어릴때의 기억은 없지만 훗날 이오덕 선생은 책이 나올때마다 직접 사인을 해주시며 ‘고향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문학관에 소장하고 있는 책을 기꺼이 내놓고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이오덕 선생의 뜻을 알리는데도 누구보다 열심이다.

1924년 청송에 사과를 처음 갖고 와 심은 박치환 선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밭에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배수경기자>

 

 

 

[가볼만한 곳]

 

신성리 공룡발자국. 청송군 제공

 

◇신성리 공룡발자국…짜릿한 공룡시대로의 시간여행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공룡 발자국 지층은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지질유산이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3년 태풍으로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발자국이 있는 면이 노출되면서 발견됐다. 경사가 심한 절벽에 총 400여 개의 발자국이 있다. 발자국 크기와 형태, 배열을 보고 공룡의 종류와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용각류가 3개에 보행열이 120여 개, 수각류가 9개에 보행열이 135개, 조각류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이곳에 살았던 용각류 공룡은 나무나 풀을 먹으며 네 발로 걸어 다녔던 초식 동물로 몸집이 크고 목이 길었고, 수각류 공룡은 육식동물로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걸로 보인다. 화석발굴체험도 할 수 있어 가족나들이 장소로도 좋다. 만안 자암단애, 신성계곡, 방호정, 백석탄계곡 등이 가까이에 있어 함께 둘러보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