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둘러싸인 특이한 지세
과거 전란시대 은신처로 제격
의병장 여대로, 가족과 함께 이주

 

김천시 구성면 금평마을은 지대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병모양의 특이한 지세를 가진 산촌마을이다.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는 아니지만 재난과 질병, 기근이 없다는 승지과 같은 곳으로 꼽힌다.

 

금평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중산간지 위치한 산촌마을이다. 조선 말 김산군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대개편 등 수차례의 행정구역 개편과 명칭 변경을 거쳐 1995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가 됐다. 지대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병모양의 특이한 지세다.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진다. 특히 마을 입구에 마주 보고 있는 산모퉁이가 서로 겹치면서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하는 형상이다.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안쪽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전란의 시대에는 은신처로 이만한 곳이 없다. 계곡을 따라 넓은 농경지가 있어 먹거리도 풍족하다. 재난과 질병, 기근이 없다는 승지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마을 표지석, 금평2리는 팥과 콩이 잘 자란다고 해서 파실과 두곡으로 불린다.

 

팥과 콩이 잘 자란다고 해서 파실과 두곡으로 불리는 금평2리에는 현재 100여 가구에 15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여대로’(1552~1619)가 가족들을 이주시킨 성산 여씨 집성촌으로 4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다. 현재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성산 여씨의 비중이 30%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인심이 좋고 우애가 깊은 양반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높은 곳이다. 정월 대보름과 어버이날, 여름철 복날(초·중·말복)등 5회에 걸쳐 마을 잔치를 열고 어르신들에게 음식을 나누면서 정을 나눈다. 청년회와 부녀회, 노인회가 힘을 합쳐 개최하고 이때는 외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도 방문해 함께 한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 양파와 복숭아, 자두를 많이 재배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여대로 유허비.

 

금평리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애국과 독립정신이다. 그 출발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나라를 지켰던 ‘여대로’로부터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아버지가 항상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빛낼 아이다”라고 칭찬을 했다.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해 성균관박사가 됐다. 자는 ‘위수’이고 호는 ‘감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김면, 곽재우, 권응성 등과 함께 지례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특히 군량을 관장한 공이 크다는 초유사 김성일의 천거로 형조랑에 올랐고 이어서 지례현감이 되었다. 지례 인근의 읍·군의 의병장이 되어 왜군격파에 전력을 다했다. 의성현령으로 있을 때 자신의 봉록으로 전란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세도가였던 정인홍과의 일화에서 곧은 성품이 잘 드러난다. 합천군수로 있을 때 정인홍이 종이와 부채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가야산에 일찍 내린 서리로 닥나무는 발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더위는 산중에도 이르렀네”라는 글로 그 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반면에 사간원정언 ‘오장’이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다 귀양을 가자 부채에 ‘술병차고 다리에서 옛 벗을 전송해도 타다 남은 풀 봄 오는 걸 못 막네. 대장부 세상에 나뉜들 혀야 없으랴만 지사는 세상일 걱정에 몸을 돌보지 않았네. 복숭아꽃 오얏꽃은 훈풍에 생색을 내지만 소나무, 대나무는 눈을 이고도 정신이 새롭네.(후략)’라는 시를 적어 주면서 위로했다.

여대로는 전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고,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살았기에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형조좌랑, 지례현감, 대구판관, 사헌부지평, 합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고종조에 이조참의에 증직됐고 경양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여대로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성산 여씨 김산종친회에서는 6월 12일에 창의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전국단위 행사로 확대 개최하는 방안을 관련기관과 협의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여채룡 선생의 동생이 쓴 옥바라지 일기 ‘소은일기’

 

 

후손 여채룡, 일제 시대 항거
‘일왕 10죄론’ 지어 배포하고
상해임시정부 국내요원 활동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여대로의 애국정신은 후손인 여채룡(1866~1936)으로 이어진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지기가 곧았으며 성리학을 익혀 문장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을사보호조약과 경술국치를 겪은 뒤 거실에 독한정(獨韓亭)이란 당호를 걸고 일제에 항거할 의지를 드러냈다. 1921년 일제의 서슬이 퍼런 감시 속에서도 ‘일왕 10죄론’을 지어 배포하고 “일본이 저지른 죄는 지하의 귀신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불의를 저지르지 말라.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거병하여 주륙하겠다.”는 서한을 총독에게 보냈다. 또한 “일본 놈을 격멸할 때는 왔다. 공력 합심하여 일어서자.”는 포고문을 전국 유림에 우송했다가 1924년 2월 상주경찰서에 발각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때 옥바라지를 한 동생(여우룡)의 옥바라지 일기인 ‘소은일기’에 여채룡의 독립의지와 옥고를 치르면서 쇠약해져 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특히 남편의 안부를 묻는 형수에게 “모습이 좋지 않다”고 하자 “떳떳한 일이니 염려치 말라. 의리를 믿고 세상에 나가 죽음과 삶을 돌아볼 수는 없다.”고 한 부분에서 부부의 굳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고사성어가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에 납세를 거부하고 송림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로 타계했다. 전국의 유림에서 조선의 백이숙제라고 칭송하고 유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상해임시정부 국내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광명강습소를 개설해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하고 애국정신을 고취시킨 여환옥(1896~1963)도 같은 성산 여씨로 바로 옆 마을인 광명리 출신의 독립유공자다.

 

도암 여희필의 학덕과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한 도양서당.

마을에는 의병장 여대로의 셋째 아들인 도암 여희필의 학덕과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한 도양서당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김천 인근에서 현존하는 서당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마을 안에 여대로의 유허비가 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이 대부분 거북형상을 하고 있는 ‘비희’라는 용이지만, 여대로의 유허비 기단석은 ‘자라’다. 기단석을 자라로 한 것은 여씨의 시조가 신라로 귀화할 때 자라가 나타나 강을 건너게 해 주었다는 시조설화와 연관이 있다. 여희필의 시문집을 발간할 때 판각한 도암집 판목이 온전한 형태로 전해져 온다. 목판은 43 × 20.5cm에 글자 크기는 1.5×1cm이다. 금평리와 광명리 성산여씨종가에서 채집한 성산여씨 가문의 가례도 전해져 온다. 종가에서 행하던 다례와 기제, 시제에 관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전통문화는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그 정신만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윤성원기자·홍상철수필가>

 

 

[우리 마을은]

 

여환익 이장

 

여환익 이장 “인심 좋고 우애 깊은 양반마을 자부심”

“우리 마을은 애국심이 충만한 마을이지요. 임진왜란 때는 감호 여대로 의병장이 이 땅을 지켰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왕 10죄론’을 지어 배포하고, ‘일본 놈을 격멸할 때는 왔다. 공력 합심하여 일어서자’는 포고문을 전국 유림에 우송했던 여채룡 의사를 배출한 곳입니다. 한편으로 4백 년을 이어온 성산여씨 집성촌으로 양반마을이라는 자부심이 있고 인심이 좋은 고장으로 소문난 마을”이라면서 “명성과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여환익 이장은 마을 자랑을 늘어놓았다.

여 이장은 젊은 시절 도시로 나가 선반과 용접 등 철공분야 기술자로 10년간 일하다가 30년 전 귀향했다. 벼와 양파, 자두를 재배하다가 현재는 벼 육묘사업을 하고 있다.

마을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에서 2차에 걸쳐 이장직을 맡고 있다. 1차에 9년간 마을을 위해 일하다가 10년 만인 지난해부터 다시 이장직을 맡아서 하고 있다. 지난해 이장직을 맡으면서 마을에 상수도를 인입시키고, 진입로와 마을 공터에 꽃밭을 조성하는 등 기반정비와 환경정비에 공을 들였다.

앞으로는 마을을 테마가 있는 마을로 가꾼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들어오면 양편으로 늘어선 골짜기마다 다양한 종류의 산나물을 심어 산채체험장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골짜기마다 고사리와 취나물, 어수리, 명이, 원추리, 곰취, 산삼 등 서로 다른 산채와 약용식물을 심어 관광객들이 산채체험을 하고 머물다가 가는 산촌체험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의병장 여대로를 비롯한 의병과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마을의 애국정신을 살려 의병마을을 조성해 청소년들의 나라사랑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특히 ‘감호당 여대로 의병대장 창의 기념식’을 더욱 발전시켜 전국단위 행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나라를 지킨 의병정신과 산촌의 특성을 활용한 산촌체험마을이 완성되면 전통과 실리를 함께 추구하는 마을로 변모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홍상철수필가

 

 

[가볼만한 곳]

 

◇ 지례 흑돼지 거리…조선시대 임금 진상품 명성

지례흑돼지거리

맛집 기행이 여행의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여행을 간 김에 그 지방의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원하는 음식을 맛보기 위해 여행을 하는 이도 많다. 맛집 기행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곳 중의한 곳이 김천 지례흑돼지거리다.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지례흑돼지는 김천시 지례면 일원에서 사육하는 흑돼지다. 일제강점기까지 지례흑돼지는 일본까지 공급할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었다. 특유의 쫄깃한 식감과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지례 흑돼지는 산간 지대에 방사하며 보리등겨 등 거친 사료로 키워 덩치가 일반 돼지보다 작지만 비계 층이 가늘고 육질이 쫄깃하여 조선 시대에 임금의 진상품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1960년을 전후해 도입된 랜드레이스나 요크셔와 같은 서양종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도태되었다.

산업화 이후에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소비자의 기호도가 바뀌면서 토종 흑돼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복원사업이 전개됐다. 지례 흑돼지를 비롯해 제주 흑돼지, 지리산흑돼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 중에서도 지례흑돼지가 가장 토종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지례 흑돼지 복원은 1987년부터 다양한 품종 간의 수없이 많은 교배와 선발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외국계 백색 계열의 돼지고기에 익숙해졌던 사람들도 지례 흑돼지를 한번 맛보면 지례 흑돼지 마니아로 변한다고 할 정도로 탁원한 고기맛을 자랑한다. 지례 흑돼지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고 있지만 성장이 느리고 고기 생산량이 적어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육 규모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현재 10여 농가에서 1만여 두가 사육되고 있다. 현재 지례면 소재지 일원에 조성된 지례 흑돼지거리에 14개소의 전문 음식점이 성업 중이다. 주말이면 흑돼지고기를 맛보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