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지어진 80살 넘은 ‘영신정미소’
세월 흔적 고스란히 품고 영업 중
‘유천극장’ 주민문화공간 역할 톡톡
새마을운동 논의하던 ‘상록수회관’
적산가옥·수동식 소방차도 그대로

 

유천문화마을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마을처럼 붙어있는 청도읍 유호1리와 내호리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유천마을은 근대와 현대의 모습이 공존하는 마을로 살아있는 추억의 거리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추억은 인생의 동반자이다. 추억은 지나온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에너지로 삼아 미래로 나아간다. 물론 좋은 추억도 있고 다시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추억도 있을 것이다. 삼국지에 추억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화가 있다. 제갈량이 북벌을 나설 때 관우의 아들 관흥과 장비의 아들 장평을 선봉장으로 삼으려 하자 조자룡이 마지막 오호장군인 자신이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제갈량이 “나이가 많은 장군이 이번 전투에서 잘못되면 인생의 모든 추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하자 조자룡이 “나의 모든 추억은 전장에 있고, 그 전장에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노장인 조자룡의 안전을 걱정한 제갈량이 추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로 전장에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조자룡은 추억을 이유로 선봉을 자청한 것이었다. 북벌에서 추억을 잃지 않고 돌아온 조자룡은 1년 뒤 전장이 아닌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한편에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추억을 떠올리고 미소를 짓는다. 지난날의 추억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보여 주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추억 박물관’이나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와 같은 이름으로 운영된다.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고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넘어 살아있는 추억의 거리로 인기몰이를 하는 곳이 있다. 청도에 있는 유천문화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60~70년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천문화마을(이하 유천마을)은 청도읍 유호1리와 내호리다. 유호리와 내호리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바로 붙어있는 한마을 같은 곳이다. 고려시대부터 유천역이 있어 유천으로 불렸다. 예전의 유천은 현재의 유호리와 내호리,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가 유천마을을 거쳐서 갔었다. 아직도 마을 뒤편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영남대로 옛길이 있다.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시 유천역이 설치되면서 인근 지역 중심 상업지로 발전했다. 지금도 농촌이지만 농가보다는 상가가 많은 마을이다. 1939년 경부선 철도가 복선화되면서 유천역은 1945년 상동면으로 이전됐다.

 

옛 유천역 자리에 유천역사를 복원해 놓았다. 역사 앞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역무원의 모습도 재현해놨다.

 

예전에 마을을 통과하던 철길은 도로로 변했고 사라진 유천역 자리에는 유천역사를 복원해 놓았다. 역사 앞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역무원의 모습도 재현했다. 유천역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서울역에서 유천역 차표를 달라고 하면 역무원이 말없이 상동역으로 가는 차표를 발권해 주는 것으로 보아 모두의 마음 속에는 유천역이 존재하는 셈이다. 향이 좋고 도수가 높았던 유천소주가 유명했으나 1966년 ‘전국 양곡 양조 금지령’에 의해 그 명맥이 끊어졌다.

 

영신정미소

 

유천마을은 근대와 현대의 모습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근대거리를 복원한 마을이 아니라 보존된 마을이다. 추억을 관광상품으로 복원해 전시하는 다른 지역의 근대문화 거리와는 달리 유천마을은 살아있는 근대거리다. 대부분의 건물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상가에선 영업활동을 한다.

 

80년이 넘은 영신정미소는 여전히 힘차게 돌아간다. 농가에서 보내온 벼를 보관하면서 연락이 오면 도정을 해주는 방식도 옛날 그대로다.

 

대표적인 시설로 영신정미소가 있다. 대들보에 ‘소화(昭化)16년…’이란 상량문이 있어 1941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80년을 넘긴 정미소지만 아직도 힘차게 돌아간다. 붉게 녹슨 함석지붕에 낡은 판자문이 정겹다. 내부로 들어가면 벼를 이송하는 송판으로 된 승강기에는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흔들리는 백열등은 뽀얀 먼지를 머리에 이고 있다. 참새들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수시로 드나든다. 농가에서 보내온 벼를 보관하면서 연락이 오면 도정을 해주는 방식도 옛날 그대로다.

 

1967년에 세워진 유천극장은 지역의 문화공간이었다. 2008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청도군에서 매입해 재건축해 개관했다.

 

유천극장은 1967년 건립되어 지역의 문화공간이었다. 2008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청도군에서 매입해 재건축해 개관했다. 월 2회 정기적으로 영화를 상영한다. 지난 4월 온누리국악예술단의 유천문화마을 문화나눔행사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문화활동 공간으로 활용된다. 인근 12개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연습장소로도 이용된다.

유천장터에서 열리는 문화행사에는 지역의 61개 자생단체들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참여해 문화행사를 진행한다. 오래된 적산가옥과 빨간색 수동식 소방차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근대 생활상 생생하게 담은 벽화
경부선 폐철로 활용 레일바이크
청도시조공원·오누이공원 마련
오누이 시인 이호우·이영도 기려
지역 근대문화자원 활성화 온힘

 

청도 유천문화마을에는 60~70년대 시대상을 보여주는 벽화가 눈길을 끈다. 집집마다 365일 태극기도 계양되어 있다.

 

다양한 벽화도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아이들, 군고구마를 먹으며 작은 TV 앞에 모여앉은 가족을 그린 벽화도 있고 실제 모습처럼 잘 표현해놓은 전파사와 사진관, 대포집도 만날 수 있다.

 

청도대포-유천사진관벽화

60~70년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표어와 포스터도 보인다. ‘1974년은 임신 안 하는 해’, ‘가족 잃고 한탄 말고 연탄가스 미리 막자’와 같은 표어를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1971년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으고 청년 50명이 직접 지은 상록수회관은 유천마을 새마을운동의 본산이다.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으고 청년 50명이 직접 지은 상록수회관도 눈여겨 볼 시설이다. 이곳은 주민 쉼터인 동시에 새마을운동을 의논하던 유천마을 새마을운동의 본산이었다.

 

청도레일바이크

 

마을 뒤 오례산 정상 부근에는 임금절로 불리는 대운암이 있다. 대운암에는 묘법연화경 목판서와 해설집이 있다. 폐선된 경부선 철로를 활용한 청도 레일바이크도 있다. 레일바이크를 타면 청도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미니 기차도 운행한다.

유천마을에는 집집마다 365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마을 출신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의미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는 10명에 이른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독립유공자가 활동한 것은 드문 사례다. 조차상(1898~1995)은 장로교회 조사였던 김보곤 등과 함께 1919년 3월 14일 유천시장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고문으로 한쪽 눈이 실명한 채 만기 출옥했고 1941년 동진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체포됐다. 1919년 5월 7일 유호리에 머물던 일본인 3명이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독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의 입술을 베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자 이종학과 이무수, 이규봉, 허곤도, 김영곤, 김도곤 등 마을 청년 20여 명이 일본인 3명을 구타해 중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의거를 3.1만세운동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최후의 폭동으로 규정했다.

 

이호우, 이영도 오누이 시조시인 생가
이호우, 이영도 오누이 시조시인 생가

 

마을에는 오누이 시조 시인으로 유명한 이호우·이영도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된 한옥 기와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ㄱ자형’을 이룬다. 이호우는 전통 시조 형식에 현대적인 감각과 정서를 담아냈고, 이영도는 여류 시조시인으로 시조집 ‘청저집’을 남겼다. 오누이 시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오누이공원’과 ‘청도시조공원’이 있다. 청도군에서는 유천마을의 근대문화자원을 활성화하고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박효상기자·홍상철 수필가>

 

 

[우리 마을은]

 

신상헌 유호1리 이장

신상헌 이장 “관광객 유치 힘써 주민 소득 안정화할 것”

“우리 마을은 청도천과 동창천의 맑은 물이 만나 밀양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두물머리로 청정한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지역이고, 사람들은 심성이 선해 이웃간에 정이 많은 곳입니다. 이제 문화마을을 통하여 예전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신상헌 유호1리 이장은 이렇게 마을 자랑을 했다.

마을은 유천역을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중심지였다. 경부선 복선화로 유천역이 폐쇄되면서 상권은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예전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60~70년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리 풍경은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보석같은 존재라고 신 이장은 강조한다.

신 이장은 부산에서 수산물 유통업을 하면서 12년 전 귀촌했다. 지금도 유통업을 하면서 마을 이장직을 맡아서 1인 2역을 하는 열성파다. 마을의 환경과 전통을 보전하는데 힘을 보탠다는 생각에서 이장직을 맡아서 봉사하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청도천 제방공사를 할 때 제방이 너무 높아 조망권이 침해받는 것을 관계기관에 건의해 높이를 조정하는 자연친화형 제방으로 변경하도록 해 하천의 안전성과 조망권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앞으로도 제2의 고향을 가꾼다는 생각으로 문화마을 활성화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문화마을 활성화를 통하여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 주민 소득의 안정화를 기하면서 웃음이 있고 건강한 마을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가볼만한 곳]

 

청도읍성

 

◇청도읍성

청도읍성은 고려 때 처음 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조선 선조 때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의 성지를 일제히 수축하는 과정에 청도군수 이은휘가 석축으로 다시 쌓은 읍성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동문과 서문 북문이 소실되었다. 이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성벽을 보수하여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2007년 복원됐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큰 화강석을 깨뜨려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섞어 가면서 흩어쌓기식으로 쌓았으며 성벽 안팎에서 성체를 쌓아 올리는 협축법이 사용됐다. 읍성 안팎에 향교와 동헌, 억만고, 고마청, 도주관, 척화비, 석빙고, 형옥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매년 4월에는 부녀자들이 성벽 위에 올라가 성곽을 밟으면서 성벽을 도는 청도읍성 밟기 행사가 열린다. 남자들은 읍성을 지키고 여자들은 성벽을 튼튼하게 다지면서 무기로 활용할 돌을 운반하는 데에서 유래한 민속놀이다.

성 밖에 작약꽃밭과 연꽃지가 조성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주말에는 하루에 3~4천명이 찾는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면서 읍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