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오동 행복황촌마을] 도심 속 ‘옛마을’, 현대적 감성 덧입다
문화재보호구역 개발 제한
시간 멈춘 듯 옛모습 그대로 간직
도시재생 뉴딜 추진 ‘새바람’
마을 특색 유지하며 리모델링
가끔씩 팍팍한 일상으로 지치고 힘겨울 때면 낯선 도시, 낯선 골목길을 거니는 꿈을 꾼다. 일상을 벗어난 여행자에게 도시 전체가 국립공원인 경주는 꽤 매력적인 도시다. 눈길 닿는 곳, 발길 멈추는 곳마다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같은 이름난 역사유적지가 있고, ‘핫플’이 가득한 황리단길은 트렌드에 민감한 이들의 발길을 불러모은다. 보문단지의 벚꽃을 시작으로 동궁과 월지의 연꽃, 황성공원의 맥문동, 첨성대 주변의 해바라기와 핑크뮬리 등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꽃구경도 경주를 찾을 이유를 만들어준다.
이제는 폐역이 된 (구)경주역 동편에 자리잡고 있는 황오동은 그간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마을이었다. 예전에는 교통행정상업의 중심지였던 역주변 마을은 현대로 오면서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마을 한쪽으로는 철길이 가로막혀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육교를 지나거나 먼 길을 둘러가야 되고 반대편으로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적인 전랑지와 남고루 등 문화재가 있어 개발이 제한돼 섬처럼 고립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마을이 조성될 때는 바둑판처럼 잘 계획된 마을이었지만 문화재보호구역이라 3층이상의 건물도 지을 수 없고 좁은 골목길때문에 신축허가도 쉽지 않은 것이 개발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마을은 시간이 멈춘듯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20년 국토부에서 추진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부터 마을에 새바람이 불어온다. 신라왕궁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황촌이라 불리던 데서 이름을 따와 ‘일상이 여행이 되는 마을, 행복황촌마을’이 탄생한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4년간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마을의 단점은 오히려 장점으로 바뀌어 행복황촌마을은 경주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은 주거지역이 관광지화 되면서 기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이주하는 현상을 말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은 목욕탕이나 미용실, 세탁소, 슈퍼 등 주민 편의시설이 카페나 음식점 등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이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마을이 된다. 행복황촌마을은 주민들이 떠나지 않으면서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마을을 꿈꾼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대부분의 마을 개발사업과는 결을 달리해 좁은 골목길, 100년이 넘는 증기기관차 급수탑,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역무원 관사 등 마을이 갖고 있는 옛 정취를 그대로 보존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것들이 황촌마을만이 갖는 특별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0년 예비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폐가를 리모델링해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인 ‘황오동 사랑채’를 열었다. 가까운 문화센터를 가려고 해도 철길 때문에 마을 어르신들이 이용하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전시실과 도서관, 동아리실과 강당 등을 갖춘 지상3층 규모의 황촌마을활력소가 문을 열면서 복합문화공간과 도시재생사업의 거점역할을 맡게 된다. 문화활동 프로그램은 사업이 끝난 뒤에도 자율적으로 운영이 가능하도록 주민 중심의 동아리 활동으로 전환하거나 경주시, 경북문화재단, 국민건강보험공단 등과 연계해 현재는 36개의 강좌가 일주일 내내 진행된다. 버려진 텃밭은 문화마당으로 조성해 국학기공 등 건강 증진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중이다.
대부분의 도시재생사업은 하드웨어에 투자를 많이 해 사업이 끝나고 나면 제대로 운영이 되지않는 경우가 많다. 황촌마을은 도시재생사업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이를 위해 주민제안공모사업 등을 통해 주민들이 마을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고 직접 예산도 집행해 보도록 했다. 소방차 진입이 안되는 좁은 골목길에 ‘보이는 소화기함’을 설치하는 것을 비롯해, 가스누출경보기 설치, 마을그림책 만들기, 골목길이야기 디지털 아카이빙 등이 주민들의 제안으로 진행된 사업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건 왜 안해주나’라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자발적으로 불편한 것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야기 담은 13개 마을호텔
주민 해설사와 마을투어 체험
입소문 타며 청년창업도 늘어
사람 머무는 ‘체류형 관광지’로
골목길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마을호텔’은 황촌마을 찾는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이다. 도시민박업은 농어촌민박이나 한옥체험업과는 달리 원칙적으로 외국인만 투숙이 가능하지만 도시재생을 위해 설립된 마을기업에 한해 내국인도 숙박할 수 있다는 특례 덕분에 행복황촌 마을호텔로 인증을 받은 곳은 국내외 관광객이 모두 머무를 수 있다.
좁은 골목길 빈집을 리모델링한 ‘스테이 황촌’이 1호 마을호텔이다. 문을 연지 6개월만에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가 될 정도로 반응이 좋다. 일제강점기 경주역 역무원 관사를 리모델링한 풀빌라 ‘황오여관’은 황촌마을의 스위트룸 역할을 한다. 100년 가까이 된 관사를 1년 동안 부부가 직접 리모델링한 ‘황오연가’, 시인부부가 운영하는 ‘스테이 詩In’, 한옥체험 숙소 ‘소여정’, 이국적인 건물의 ‘블루플래닛’, 황촌마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행복 꿈자리’ 등 현재는 13개의 마을호텔이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특색있는 마을호텔이 자리를 잡으면서 황촌마을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체류형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을호텔에서 잠을 자고 마을공동부엌인 ‘황촌정지간’에서 조식을 먹고 주민해설사와 함께 마을투어와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이런 변화에 마을로 돌아오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청년창업도 늘어났다. 스토리가 있는 카페나 식당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트렌드에 민감한 관광객들의 발길도 마을을 향하고 있다.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옛 경주역장 관사는 지난해 9월 옛 모습을 살려 카페 ‘보우하사’로 변신했다.
너무 낡아 자세히 보아야 읽을 수 있는 ‘삼형쌀집, 신라슈퍼’ 간판이 걸려있는 곳은 카페 ‘고냅브로시스’다. 주민들이 쌀도 사고 라면도 사던 오래된 슈퍼와 구옥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남매가 탐험하다’라는 의미의 카페 이름처럼 남매가 함께 운영한다.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을 행복황촌으로 이끈다. 카페 ‘정상에서’는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황촌마을은 당장 눈에 띄는 개발보다는 옛 모습에 현대적인 감성을 덧입혀 주민들과 함께 공존하는 길을 찾았다. 떠나고 싶은 마을에서 이사오고 싶은 마을로 자리잡으며 주민들은 일상을 여행처럼 즐기고, 관광객들은 마치 외갓집에 놀러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고 싶다면 행복황촌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권해본다. 골목길 구석구석 느린 걸음으로 다니면서 만난 보물같은 마을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무를 듯 하다.
<안영준·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민대식 센터장·정수경 이사장“주민 주도 도시재생사업 본궤도”
행복황촌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민대식 센터장은 상권전문가다. 그간 경주야시장과 문경상권활성화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2021년부터 행복황촌 도시재생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사업이 올해로 끝이 나면 현장지원센터는 마을을 떠난다. “그동안의 도시재생사업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진행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업기간이 끝난 뒤 별도의 예산투입이 없으면 중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이 지금처럼 수익을 내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짧은 사업기간에도 황촌마을은 빈집을 이용한 창업이 늘어나고 집값도 오르고 주민주도 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어느정도 목표는 이루었다고 본다.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마을은 찾는 이들도 많다. 마을호텔이 20개가 넘어가면 황촌마을의 자생력도 높아질거라 생각한다. 마을호텔과 황촌정지간, 황촌마을활력소, 황촌상권활력소가 연계해 공동마케팅과 판매, 세탁, 식음, 청소, 시설보수까지 할 수 있는 위탁회사 설립도 꿈꾼다. 민 센터장의 바람은 행복황촌이 새로운 개념의 도시재생사업 성공사례로 자리잡아 제2·제3의 행복황촌마을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년부터 행복황촌마을은 온전히 주민들의 손으로 꾸려나가야 된다. 행복황촌협동조합 정수경 이사장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45명의 조합원은 마을부엌, 숙소운영, 지원사업, 사회공헌 등 4개로 분과를 나누어서 활동을 한다. 2023년 문을 연 마을 부엌 ‘황촌정지간’에서는 마을호텔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조식제공, 경주시민을 위한 도시락·반찬 판매, 요리교실, 취약계층을 위한 반찬봉사도 한다. 정 이사장은 “조용하지만 활기가 없었던 마을이 행복황촌 마을 사업으로 활기를 찾고 있다”며 “어르신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시는게 보람이다”라고 덧붙였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요. 협동조합의 이름에 걸맞게 조합원들이 마음을 합해 마을을 잘 꾸려나가고 싶습니다.”
[가볼만한 곳]
◇경주문화관 1918…폐역 ‘문화공간’ 탈바꿈
1918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경주역은 2021년 12월 폐역이 되었다. 한옥 양식의 외관을 한 역사는 (구)경주역이라는 이름으로 보존이 되어있다. (구)경주역은 2022년 12월, 전시공간·창작스튜디오·카페를 갖춘 복합문화공간 ‘경주문화관 1918’로 탈바꿈했다. 역 광장은 인조잔디를 깔아 공연, 버스킹, 아트마켓 등을 개최한다. 역사 앞쪽으로는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행복황촌마을에서 (구)경주역으로 가려면 이제는 육교를 건널 필요는 없지만 육교 위에서 경주역과 철로를 한번 내려다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길 건너 성동시장은 1971년 문을 연 상설시장으로 경주에서 유일하게 새벽시장이 열린다.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된 우엉김밥을 비롯 문어, 양념통닭 등의 먹거리들도 놓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