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피끝마을] 핏빛 서린 모진 역사의 땅, 그린체험마을 거듭나다
역모의 땅으로 낙인 주민 몰살
‘피가 흘러 그친 곳’서 지명유래
2020 경상북도 마을이야기- 영주 피끝마을
어떤 사람들은 ‘역모의 땅’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충절의 땅’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생각은 비극을 불렀다. 감당하기 벅찬 비극이 순흥땅에서 일어났다. 비극의 흔적은 죽계천을 따라 끝없이 흐르다가 십리를 가서야 멈추었다. 흐르던 피(血)가 멈춘 곳이라 하여 ‘피끝’이라 불렀다. 슬픈 이름이 된 피끝은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다.
1457년 7월 11일 안동부사 한명진이 포졸들을 이끌고 순흥도호부를 들이닥쳤다. 관속은 물론 백성까지 보이는 대로 죽였고, 관아는 불태웠다.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한양에서 급파된 철기군까지 합류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철기군은 더 큰 비극을 가지고 왔다. ‘삼십리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여라.’ 순흥 사람들은 줄줄이 묶여 청다리 밑으로 끌려가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관노의 밀고로 들통이 났기 때문이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안동대도호부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땅은 세 갈래로 나뉘어 영천과 풍기, 봉화에 편입되었다. 역모의 땅이라는 이유로 몇 년 동안 출입을 막고 시신을 방치해 금단의 땅이 되었다.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을 모셔와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참변을 겪은 ‘정축지변’이다.
정축지변은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식도 그 중의 하나다. ‘태평초’라는 음식이 있다. 이름만큼 팔자 좋은 음식은 아니라 고난이 묻어 있는 음식이다. 정축지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먹거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산속이라 곡식을 심을 땅도 부족했고 잘 자라지도 않았다. 메밀은 언제 어디에 심어도 잘 자랐다. 이걸로 메밀묵을 해 먹었다. 이것이 태평초다. 궁중음식이었던 ‘탕평채’가 고급 재료인 청포묵을 썼다면 태평초는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메밀묵을 사용했다. 여럿이 나누어 먹고 정을 나눌 수 있도록 한 음식이다. 농사일이 끝난 겨울철 태평스러운 시기에 먹던 음식이라고 태평초라는 설이 있지만 한(限)이 서린 음식이다. 편안한 세상을 바라던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어 괜히 숙연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피끝마을에서 ‘한방 태평초’라는 이름으로 복원해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매주 목요일 밤이 되면 피끝마을이 뜨거워진다. 그 열기의 주인공은 마을 어르신들이다. 70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삼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형극을 배우고 있다. 최고령자는 80세나 되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가졌다. 정축지변과 피끝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만든 것이다. 남녀 어르신 15명이 참여해 인형극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배운다. 영주에서 활동하는 극단 어울림 단원들이 지도한다. 인형극을 통하여 지역의 역사를 알리고 마을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조만간 지역의 축제와 문화행사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도농교류센터 강당에 들어서면 오래된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마을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사진들이다. 잊혀져가는 예전의 모습을 보전하고 추억을 되새기자는 의견을 모아 옛날 사진을 전시한 것이다. ‘별난마을 별난축제’라는 이름으로 각 가정에서 보관하고 있던 옛날 사진들을 찾아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회갑잔치 사진에서부터 상여 나가는 사진,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안길을 넓히는 사진 등 50여 점이 전시됐다. 마을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한 점도 나오지 않은 점과 오래된 사진이 예상보다 많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마도 어렵던 시절에 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정도로 여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고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러나 출향인사들을 대상으로도 계속 수집활동을 전개해 예전의 마을 모습을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참 살기좋은 마을’ 입증
꽃길 조성·우물터와 돌담 복원
연말 콘테스트서 3천만원 상금
풍차 건립 경관조성에 재투자
마을 가꾸기에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았다. 영주시에서 추진한 2007년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사업’에 선정되어 2천 만원의 사업비를 받아 꽃길조성과 옛날우물터 복원, 돌담복원사업을 추진했다. 공모사업으로 추진되어 주민참여 계획의 구체성과 주민참여 정도, 주민 참여가능성, 독창성과 지역자원의 활용여부 등에 대한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쳤다. 추진과정에는 모든 주민이 참여했고 연말 콘테스트에서 3천 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 상금은 마을의 경관조성을 위한 풍차 건립 등 마을가꾸기 사업에 재투자했다. 이를 계기로 마을 환경정비와 꽃길 제초잡업 등에 모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역사·문화콘텐츠 ‘즐비’
붉은 충절 ‘사육신과 박신문’
태평초·생강떡 만들어 맛보고
죽계구곡트레킹 힐링 숲 체험
피끝마을에서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체험활동들이 진행된다. 역사·문화체험과 그린힐링체험, 향토음식체험이 대표적이다. 역사·문화체험은 정축지변을 배경으로 한 ‘피끝마을 역사로드 트레킹’과 붉은 충절 ‘사육신과 박신문’을 비롯해 천연염색과 민화체험이 진행된다. 그린힐링체험은 소백산 ‘죽계구곡트레킹’ 숲체험, ‘자연을 꾸미기’ 농산물 수확체험을 할 수 있다. 태평초를 비롯한 삼계탕과 생강떡 만들기 등 다양한 음식관련 체험도 가능하다. 녹색체험관과 펜션이 있어 숙박도 가능하다.
김교윤기자·홍상철 수필가
<우리 마을은>
박광훈 이장은 서울에서 섬유 수출업을 하다가 2004년 귀향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귀향했지만 이장을 맡으면서 농사일은 포기하다시피 했다. 마을 일에 너무 집중한 열정 때문이라고 했다. 이장을 두 번 맡았다. 처음 이장직을 맡은 것은 귀향 첫해 마을 어르신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자네가 대학도 나왔고, 서울에서 회사를 경영하면서 외국 경험도 많고 하니 마을을 이끌어 주게.” 라고 하는 마을 어른들의 요청을 거절 할 수가 없어서 맡았다. 그때부터 마을 바꾸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녹색농촌체험마을 위원장도 맡아서 1인 2역으로 활동했다.
2007년부터 마을 뒤 미궐봉에 있는 성황당의 제사가 구제역과 브루셀라 등 가축전염병으로 중단된 것을 다시 현재의 실정에 맞는 방법으로 복원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 단순한 제사의 개념을 넘어서 관광자원화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성황당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정축지변을 겪은 후에 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마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져 어려움이 많았다. 무녀 ‘고씨’가 성황당에서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면서 우환이 없어졌다.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또 다시 마을에 우환이 많이 일어나자 재건했다. 마을출신 출향 기업인이 어릴 적 성공하면 성황당을 기와로 바꾸어 주겠다고 혼자 다짐했던 약속을 지켜 2006년에 새롭게 단장했다.
요즘 박 이장의 가장 큰 고민이 ‘어떻게 마을을 유지하고 전통의 맥을 이어갈 것인가?’라고 한다. 따라서 마을에 사람을 불러들이는 일에 주력한다. 귀농·귀촌을 주선하고 마을 축제를 개최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농촌봉사활동을 온 대학생들과 힘을 모아 허수아비축제를 개최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한다. 예전의 허수아비는 들판의 새를 쫓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것이 목적이다. 축제는 허수아비를 만드는 재료를 참가자들이 가져와서 자기만의 허수아비를 만드는 방식이다. 협동심을 키우고 추억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참가자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박 이장의 열정은 끝이 없다. “고령화로 노인들의 요양원 입소가 늘어나지만 노인들은 마을을 떠나는 일을 힘들어 한다” 면서 “녹색체험마을이나 권역단위사업장을 요양시설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국민청원에 올렸다. 노인들이 고향 마을에서 케어를 받을 수 있어 입소부담이 줄고 예산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열정맨으로 불리는 박 이장의 생각과 활동영역은 한 곳에 한정되지 않아 보였다.
<가볼만한 곳>
◇유네스코 등재 ‘한국의 서원’…소수서원
2019년 소수서원을 비롯한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됐다.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기능을 가진 조선시대의 사립교육기관이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1542년 백운동서원을 창건했고,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 사액을 받은 최초의 서원이다. 그 동안 4천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원나라에서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주향했고, 후손인 안축과 안보, 주세붕을 배향했다. 안향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와 안향과 주세붕, 이덕형 등 6명의 초상을 봉안한 영정각,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 장서를 보관한 장서각, 취한대, 경렴정, 전사청, 학구재, 지락재 등 많은 시설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