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600m 고원분지 마을 형성
곤충·비곤충류 65종 서식 확인
장구메기습지, 람사르습지 등록 추진
밤이면 쏟아지는 별빛 ‘장관’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간직

 

포산마을은 해발600m에 위치한 고원분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분지 중심부에 고산습지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주택과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그동안은 찾아가기 힘든 산간 오지였으나 지금은 힐링을 선호하는 시대에 걸맞게 청정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김선국 객원사진기자

 

영양군 석보면 포산마을은 해발600m에 위치한 고원분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좁은 산길을 따라 3km 정도 오르면 50만㎡에 이르는 고원분지에 마을과 농경지, 고산습지가 펼쳐져 있다. 가운데가 오목한 분지형 마을로 화채그릇(punch bowl) 모양을 하고 있어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을 연상시킨다. 산머루가 많다고 하여 머루산이라 불리다가 머루의 한자인 포(葡)를 차용하여 포산으로 불린다. 고도가 높지만 물이 흔해 농사를 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땅이다. 통상적으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의 고도가 해발 600~700m라고 한다. 유명 휴양지가 대부분 이 정도의 고도에 위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람들에게 쾌적함을 주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행복고도 600’이라는 표지판의 의미를 알 듯하다.

‘행복고도 600’이란 브랜드로 사람이 살기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리기에 여념이 없는 포산마을은 최근 새로운 명품 생태마을 준비로 분주하다. 3만8천㎡ 규모의 산지습지로 면적이 넓고 보전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구메기습지의 보호지역 지정과 람사르습지 등록을 추진하는 것이다. 안동대학교 김광덕 교수의 ‘영양 장구메기 습지 내 저서성 대형무척추동물의 군집구조와 섭식기능군 연구’에 따르면 이 곳에는 곤충류외 비곤충류 65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9월에는 KT&G와 국립생태원이 ‘생태계보전과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그 첫 사업으로 장구메기 습지 보호활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발맞추어 주민들의 노력도 적극적이다. 그동안 습지보호지역 지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7회에 걸쳐 주민역량교육을 실시했다. 앞으로 최종보고회와 선진지 견학도 추진할 계획이다. 생물다양성이 높은 장구메기 습지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고 람사르습지 등록이 이루어지면 포산마을은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를 전망이다.

그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았던 만큼 훼손되지 않은 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에 들어서면 동해에서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밤이 되면 손에 잡힐 듯 커다랗게 보이는 별빛이 함박눈처럼 쏟아진다. 여기에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까지 더해져 감히 별천지라 부를만한 곳이다. 이 별천지에는 20가구 34명의 주민들이 생활한다. 1반인 포산마을에 10가구, 2반인 복골마을에 10가구가 있다.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주민수가 적으니 이웃간의 정이 깊어 모두가 가족같고 친척같다.

 

친정나들이가 어렵던 시절에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쯤에서 만나 정을 나누었다는 반보기터.

포산마을로 오르는 중간에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부인 한재여 여사의 무덤이 있다. 친정나들이가 어렵던 시절에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쯤에서 만나 정을 나누었다는 반보기터도 있다.

 

영양마을이야기-머루산성지
천주교인들이 모여살던 머루산 교우촌은 천주교 복자 3명을 배출한 성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민 피난지 역할
신유박해 천주교 신자 교우촌 형성
역사 현장 보전에 순례객 방문
연말까지 성모동산 조성사업도
마을 주변 트레킹 코스도 정비

 

5백여 년 전에 우씨 일가가 처음으로 들어와 화전을 일구면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지는 포산마을은 고난과 역경의 땅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 주민들의 피난지 역할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교우촌이 만들어졌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이곳에 살던 33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안동감영으로 이송됐다. 이때 20명은 풀려났으나 나머지 1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이후에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교우촌은 사라졌다. 이때 순교한 ‘김시우 알렉시오’와 ‘이시임 안나’ ‘김강이 시몬’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복자로 시복되었다.

또 다른 2명도 가경자로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항일투장을 하면서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3.1만세 운동 때 이곳 주민들이 가담하면서 왜경의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전후에는 공비들의 출몰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독립운동가 이상동 선생이 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상동 선생은 항일명문가인 안동 임청각의 이상룡 선생의 친동생이다.

현재 영양군에서는 천주교 안동교구와 협력해 머루산성지를 정비하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전하고 있다. 정자와 쉼터를 조성하고, 8백m에 이르는 성지역사탐방로는 데크로드와 야자매트를 설치해 순례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올해 말까지 2차로 성모동산 조성사업도 추진한다. 탐방로 주변에는 3백 그루의 머루나무를 심어 머루산의 이미지를 브랜드화하고 있다. 앞으로 머루가 성장하면 머루터널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천주교 안동교구와 자매결연도 맺었다. 마을에선 성지를 관리하면서 성지순례를 돕고, 교구에서는 이곳 농산물을 우선 구매하는 윈윈전략이다. 독립운동가 이상동 선생이 건립했던 교회를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포산마을에서는 고추와 고랭지배추, 콩을 많이 재배한다. 뚜렷한 계절의 변화와 고지대의 큰 일교차, 직선거리로 20km에 불과한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함유된 미네랄 성분 덕분에 포산마을의 농산물은 고품질 농산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을에는 특별한 먹거리도 있다. 어렵던 시절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었던 고추죽은 맷돌에 간 통고추를 끓이다가 밀가루를 풀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포산마을 만의 특별한 먹거리다. 이제는 밀가루 대신에 찹쌀을 쓰고, 버섯과 쇠고기를 넣어서 끓여 전통을 지키면서도 맛과 영양을 보강한 먹거리가 되었다. 마을 습지에서 잡은 미꾸라지에 고추장을 넣고 끓인 ‘꼬장탕’도 있다. 꼬장은 고추장의 이곳 사투리다. 포산마을은 산촌마을의 특성상 비탈 밭이 많아 평지보다 농사일에 2~3배의 힘이 든다. 꼬장탕은 힘든 농사일을 견뎌내기 위해 만든 지역 특유의 먹거리라고 할 수 있다.

 

포산마을
포산마을슬로건, 행복고도 600 표지판.

 

‘행복고도 600’이란 슬로건과 함께 포산마을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외지 탐방객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비한 마을 정비사업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3km에 이르는 좁은 산길은 탐방객들이 마을을 찾을 때 가장 걸림돌이 된다. 특히 초보 운전자들에게는 넘기 힘든 장애물과 같았다. 지난 2021년 1차 진입로 확장공사를 추진해 1.5km 구간을 확장했다. 나머지 구간에 대한 2차 사업도 준비 중이다.

 

영양포산마을소공원
마을 중심에 마련된 소공원.

 

머루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이 보다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단체관광객을 위한 대형차량 주차장도 마련했다. 마을 주변 산들을 연결하는 명품등산로 정비사업도 마무리 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로 포산마을을 중심으로 머루산과 삼의계곡을 아우르는 명품 트레킹코스다. 마을 중심부에 소공원과 주차장도 만들었다. 마을 내 습지에는 연꽃단지도 조성되어 있다. 이 같은 정비사업을 통하여 행복고도 600 포산마을은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머물거리가 있는 명품 마을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춘기자·홍상철수필가

 

 

 

 

<우리마을은>

 

영양포산마을-유철균이장
유철균 이장

 

유철균 이장…”보고 먹고 즐기는 힐링 공간 조성”

“여태껏 보물 속에서 살면서 그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 보물을 갈고 닦아 좀 더 빛나는 보물로 만드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라는 말로 유철균(55) 포산마을 이장은 각오를 다진다. 유 이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포산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인근에 있는 천마가공회사에서 20년간 일하다 지난 2019년부터 마을 이장을 맡아 마을을 가꾸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마을의 슬로건인 ‘행복고도 600’에 걸맞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마을, 소득이 있는 마을로 만들어 관광객과 주민들이 모두 행복한 마을을 만들겠다는 것이 유 이장의 꿈이다. 우선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3km의 진입로 1차 확장사업을 마무리하고 2차 확장사업을 준비 중이다. 단체 관광객을 위한 대형 주차장도 마련했다. 마을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명품등산로와 성지역사탐방로도 개설했다. 성지역사탐방로에는 300그루의 머루나무도 심었다. 마을 중심부에는 소공원을 만들어 작은 음악회도 열고 휴식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소공원에 비치된 피아노는 탐방객들이 직접 연주할 수도 있고 포토존으로도 활용된다. 인근 문화예술인들의 재능기부로 지금까지 3회에 걸쳐 작은 음악회도 열었다. 마을 습지에 연꽃을 심고 밭에는 국화와 천일홍을 심어 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유 이장은 포산마을을 ‘보고 먹고 쉴’ 곳이 있는 힐링의 공간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추진했던 마을기반 정비사업도 이 같은 큰 계획의 일부다. 앞으로는 먹거리와 쉴 공간의 마련에 주력할 방침이다. 마을의 특별한 먹거리인 고추죽과 꼬장탕을 현대적 입맛에 맞도록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먹거리도 개발할 계획이다. 마을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연산 식재료들을 활용한다는 생각이다. 우선 함암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머위와 화살나무를 이용해 치유와 맛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이용해 음식을 통해 심신을 치유하는 ‘식치마을’을 만들 계획이다. 예전의 담배 건조장을 복원한 황초굴 민박도 계획하고 있다. 이런 사업을 통하여 포산마을을 보고 먹고 즐기면서 머무를 수 있는 마을로 만든다는 큰 그림이다. 홍상철수필가

 

 

 

<가볼만한 곳>

 

가볼만한곳두들마을

◇ 두들마을…재령 이씨 집성촌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두들마을은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개척한 마을로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 입구 바위에 낙기대(樂飢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배고픔을 낙으로 삼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갈암 이현일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기년예설’을 비판하고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노론세력에 대항한 것이다. 이현일은 노론으로부터 ‘명의죄인’(죄를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 죄인)으로 낙인 찍혀 이후 재령 이씨들은 200여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도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을에는 석계고택과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 채가 있다.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계향을 기리는 유적비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이 있다. 교육원에서는 음식디미방 식사체험과 음식만들기 체험, 전통주 만들기 체험, 전통문화체험, 한옥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을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구황식품으로 쓰기 위해 심은 3백년 된 상수리나무 수십 그루가 있다.

 

◇삼의계곡…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곳

맹동산(812m)의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된 삼의계곡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어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고 차갑다. 울창한 원시림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원한 물소리를 내지르는 폭포가 여러 군데 있으며, 한여름에는 기온 차이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가을에는 골짜기 원시림에 단풍이 들면 더욱 절정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