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마을]마을 전체가 문화재…외나무다리 건너면 400년 역사 ‘생생’
마을 3면 휘감아 도는 내성천
물 위에 뜬 섬 같아 ‘무섬’ 불러
아침마다 물안개 휩싸여 몽환적
기와집·초가집 어우러진 마을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간직
길이 150m 폭 30㎝ 외나무다리
한국 아름다운 길 100선 꼽혀
2022 경상북도 마을이야기 – 영주 무섬마을
새소리에 눈을 떠 문 밖을 나서니 마을이 온통 안개에 휩싸여 있다. 전날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외나무다리가 물안개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탄성이 절로 터져나온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부지런한 사진작가들이 어디에선가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면 볼 수 있는 선물같은 풍경이다.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휘감아 도는 전형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너른 모래톱 위에 말발굽 모양으로 자리잡은 마을은 건너편에서 보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여 ‘물섬’이라 부르다가 ‘무섬’이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상의 지명인 수도리는 무섬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과거에는 중국 왕휘지의 고사에 나오는 중국 절강성의 마을과 비슷하다 해서 그 이름을 그대로 따 섬계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작은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를 건너면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듯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옛 마을이 눈 앞에 나타난다.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수 선생은 병자호란을 거치며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벼슬의 길을 버리고 1666년 이곳으로 이주를 한다. 이후 증손녀 사위인 김대 선생이 처가동네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반남 박씨와 예안(선성)김씨 양성이 사는 집성촌으로 400여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120여세대 500여명이 거주할 정도로 번성한 마을이었으나 1960년대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떠나는 주민이 급격히 늘어나 현재는 40가구에 평균연령 75세 이상의 주민 40여명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소멸위기에 처해졌던 마을은 2013년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중요민속문화재(제278호)로 지정되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관광지로 이름나 사람들이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 식당이나 기념품 판매처들이 먼저 들어서기 마련인 여타의 마을과 달리 무섬마을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느리게 흘러간다.
현재 마을에는 해우당과 만죽재 등을 비롯해 경상북도문화재로 지정된 9채의 고택이 있고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만죽재고택은 입향시조인 박수 선생의 12세손이 거주하고 있다.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를 갖고 있는 만죽재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ㅡ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사방을 둘러싸듯 배치된 ㅁ자형으로 문밖에서는 집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별채인 섬계초당에 오르면 무섬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큰 집인 해우당고택은 예안김씨 입향조인 김대 선생의 후손인 김낙풍 선생이 1879년 지은 살림집으로 사랑채에 걸린 ‘해우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있다. 마을의 중앙에 있는 만운고택은 시인 조지훈의 처가이기도 하다. 조지훈은 그의 시 ‘별리’를 통해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무섬마을의 초가집은 문을 닫으면 외부와 단절되는 집의 구조때문에 연기와 냄새의 배출을 위해 지붕 양쪽으로 구멍을 뚫어놓은 까치구멍집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택도 볼만하지만 무섬마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외나무다리다.
1983년 수도교가 준공되기 전까지 길이 150m, 폭 30㎝ 남짓한 외나무다리는 외부와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넓은 모래톱 위에서부터 시작돼 내성천 위를 가로질러 부드러운 곡선으로 놓인 다리는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중 한 곳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낭만의 상징이자 인생사진 명소지만 마을사람들에게 외나무다리는 ‘시집 올 때 가마타고 들어오면 죽어서 상여타고 나간다’는 말처럼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곳이다. 해마다 장마에 떠내려가면 새로 놓기때문에 그때 그시절의 다리는 아니지만 외나무다리 앞에 서면 그곳을 건너던 이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듯 하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선비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금은 외나무다리 중간중간 비껴설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작은 공간이 있지만 예전에는 멀리 건너편에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이 건너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무섬마을은 전국의 단일마을 중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포상자만도 5명에 이른다. ‘아세아 조선반도 내 수도리에 있는 서당’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서숙’은 농민계몽활동과 지역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던 김화진(해우당의 증손자)선생의 주도하에 192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33년 일제에 의해 불태워져 문을 닫기까지 독립운동의 거점역할을 했다. 최근 고증을 거쳐 재건했다.
무섬마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고택에서 하룻밤 묵으며 1박 2일 여유롭게 보내는 것도 좋다.
무섬마을은 빠름을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잠시 느리게 걸으며 여유를 가지고 싶은 이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곳이다.
김교윤·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박천세 무섬마을보존회 부회장“고택서 하룻밤, 잊을 수 없는 경험이죠”
박천세 무섬마을보존회 부회장은 마을 입향조인 박수 선생의 12세손이다.
박 부회장은 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떠났다. 종손으로 조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는 방학이면 늘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쭈욱 대도시에서 생활했지만 언젠가는 당연히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다 올해 6월에 귀향했다.
“무섬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 곳이라고. 우리 다음 세대가 문제죠”
지난 7월에는 아들 박필승 씨가 결혼을 하면서 새 신부를 태운 가마가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40여년만에 외나무다리를 건넌 가마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아들부부가 마을의 전통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는 무섬마을이 영주의 대표적인 관광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관광지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마을 공동사업 등을 통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지만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이익이 따르더라도 명분이 없으면 하지 않는 전통적인 선비정신 때문에 변화는 더디다.
“제가 62살인데 마을에서 제일 젊습니다. 청년회장이 71세인데 이런 식이라면 20년 안에 마을의 명맥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감으로 인해 2000년대 초반 무섬마을보존회(회장 박화서)가 설립돼 마을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면서 후손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한다.
지난 10월 1일부터 이틀간은 평화롭고 조용하던 마을이 오랜만에 시끌벅적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섬외나무다리축제가 3년만에 대면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무섬외나무다리축제가 마을 단위의 축제를 넘어서 영주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 하기를 바란다.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고택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무섬마을의 낮과 밤을 경험한 이는 꼭 다시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달빛을 벗삼아 강변을 걸으며 물소리와 자신의 발자국의 소리에 귀기울여보고 새벽 물안개에 휩싸인 외나무다리를 건너보는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준다.
“무섬마을이 잠깐 놀러와서 급하게 돌아보고 가는 곳이 아니라 느긋하게 힐링하는 마을로 자리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택체험을 기반으로 한 체류형 관광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합니다.”
배수경기자
가볼만한 곳
◇소수서원…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개 중 하나이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인 안향을 기리고자 세운 ‘백운동서원’이 1550년 퇴계이황의 건의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수령이 3백년에서 천년에 이르는 500여그루의 적송이 군락을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서원에 들어서면 안향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와 안향과 주세붕, 이덕형 등 6명의 초상을 봉안한 영정각,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 장서를 보관한 장서각 등이 있다. 취한대와 경렴정 등의 정자에서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