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백천 마주보는 배산임수지
600년 뿌리 깊은 성산이씨 집성촌
사도세자 호위무관 이석문 선생
세자 그리며 북쪽으로 낸 사립문
한주종택 등 10곳 경북문화재 지정
과거급제 선비 행진 ‘삼일유가축제’
줄타기·남사당놀이 등 볼거리 ‘풍성’
 

전통가옥과 토석담이 잘 어우러진 한개마을 전경. 전영호기자
전통가옥과 토석담이 잘 어우러진 한개마을 전경. 전영호기자
 

빠름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다보면 여행도 마치 얼른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정해진 코스를 따라 허둥지둥 조급한 마음으로 하게 될 때가 있다. 가끔씩 삶의 속도에 멀미가 느껴질 때는 잠시 속도를 줄이고 느린 걸음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느린 걸음 걷기에 어울리는 마을이 있다. 바로 성주군 월항면 한개마을이 그곳이다.

한개마을은 중요문화재 제 255호로 국가지정민속마을 중 한 곳이다. 전국에 국가지정민속마을로 지정된 곳은 7곳으로 성주 한개마을을 비롯해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영주 무섬마을, 아산 외암민속마을, 제주 성읍민속마을, 고성 왕곡마을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을 뒤편으로는 영취산이 포근히 감싸안고 있고 마을 앞에는 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세를 갖고 있는 한개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마을 표지석 앞의 상사화가 먼저 반겨준다. ‘크다’는 의미의 ‘한’, ‘개울이나 나루터’를 일컫는 ‘개’, 마을이름에서 느껴지듯 예전에는 마을 앞에 큰 개울이나 나루터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한개마을은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의 입향으로부터 시작되어 600년 가까이 내려온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이후 광해군 시절 한개마을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던 월봉 이정현 선생의 아내로 20대초반에 남편을 여의었지만 유복자 아들과 함께 마을을 지킨 우봉 이씨의 선택이 오늘날의 한개마을을 있게 했다고 전해져온다.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은 대부분 24촌 이내의 친척지간이다. 영취산 자락을 따라 남서쪽으로 자리잡은 75동의 건물 대부분은 18세기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건립됐으며 그 중 교리댁, 한주종택, 진사댁 등 10곳은 경북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옛 집들 가운데서 한주종택과 응와종택은 꼭 둘러보도록 하자.

황토와 돌을 섞어 쌓은 토석담이 아름다운 한개마을 고샅길
황토와 돌을 섞어 쌓은 토석담이 아름다운 한개마을 고샅길

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 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 챙겨들고 마을 고샅을 따라 슬슬 걸어올라가다보면 광대바위를 만난다. 오래전 광대들이 바위에 줄을 묶고 줄놀이를 하던 때의 안타까운 전설이 남아있는 바위이다. 두 갈래로 나뉘어진 골목길 사이에서 망설이다 먼저 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한 한주종택을 향해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한 개마을은 황토와 돌을 함께 쌓은 토석담과 골목길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마치 시간여행을 온 듯 발걸음부터 달라진다. 제대로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면 마을 입구의 한복체험장에서 한복을 빌려입고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한개마을 제일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주정사
한개마을 제일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주정사

 

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주종택은 독립운동가 이승희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옆쪽으로 난 문을 통해 한주정사로 들어서면 긴 머리를 늘어뜨린 듯한 수양버들과 기품있는 소나무가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공조판서를 지낸 이원조 선생이 사시던 응와종택
공조판서를 지낸 이원조 선생이 사시던 응와종택

 

대감댁이라는 큰 표지석과 소슬대문이 인상적인 응와종택은 공조판서를 지낸 이원조 선생이 사시던 곳이다. 응와종택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북비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문이 하나 보인다. 북쪽으로 난 문은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북비고택은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 선생이 은거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영화 ‘사도’에서 세손을 업고 사도세자를 만나게 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인물이 바로 이석문 선생이다. “부자의 상면은 하늘의 뜻이라 임금도 막을 수 없다”라는 말로 세손과 사도세자의 만남을 도운 죄로 곤장 50대와 함께 파직을 당해 이곳으로 내려온 그는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 세자를 그리워하며 지냈다고 한다. 소박하고 한편으로는 초라해보이기까지 한 북비고택은 한 신하의 충절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공간이다. 마을 곳곳에 담긴 역사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마을해설사의 도움을 받으면 좋다.

한개마을은 국가지정민속마을이 된 후 최대한 상업화를 피하고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대부분의 민속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를 기대하고 마을을 찾았다가는 너무나도 고즈넉한 마을 풍경에 놀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매력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한개마을에서는 마을주민 중심의 ‘한개민속마을 보존회’에서 상시공연과 전통문화 체험을 진행한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짚공예나 목공예체험, 그리고 한복 및 유복입기체험도 할 수 있다. 진사댁, 우산댁, 왜관댁 등에서는 고택체험(민박)도 가능하다. 8월초부터는 지하 150m에서 나오는 지하수로 수영장도 개장했다. 선비문화와 광대문화가 공존하는 한개마을의 상설공연 ‘삼일유가놀이 광대걸’은 7,8월을 제외한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여동서당에서 열린다.마을 회관 앞마당과 월봉정은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열어놓았다. 한개마을은 평일에도 200여명, 주말에는 500여 명, 연간 10만명 이상이 마을을 찾는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마을을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 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열린 삼일유가축제에서 줄타기 공연을 펼치고 있다.  한개마을제공
지난해 열린 삼일유가축제에서 줄타기 공연을 펼치고 있다. 한개마을제공

조선시대 과거에 장원 급제한 선비에게 임금이 3일간의 유가(三日遊街)를 주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어사화를 꽂은 장원급제자는 말을 타고 광대와 재인들을 앞세워 친족을 방문하며 3일간의 축제를 펼쳤다. 그 전통을 되살려 한개마을에서는 삼일유가축제를 펼친다. 올해는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 열릴 예정이다. 이 기간 동안은 남사당놀이, 줄타기, 풍물놀이. 그리고 다채로운 체험과 먹거리들이 준비된다.한개마을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 불편하지만 그 가치를 지켜나가고 있는 곳이다. 한개마을에서는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다. 저마다 여유시간에 맞춰 1시간, 2시간, 3시간 코스를 정해 둘러보면 된다. 골목길 굽이굽이 서려있는 세월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천천히 걸어보자. 혼자라도 좋고 여럿이 함께라도 좋다.

추홍식·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문화농부 자부심 갖고 고유 예술 정체성 정립”, 이수인 한개민속마을보존회 회장

 

이수인 한개민속마을보존회 회장

북비공 이석문의 8대손인 이수인회장은 2007년 한개마을이 국가지정민속마을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한개민속마을보존회 사무국장, 회장을 거치며 기획전문가로서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 최근 잠시 휴식기간을 가지는 동안은 한개마을 문화사업단을 꾸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한개마을에서 문화농사를 짓는 ‘문화농부’라 칭한다.

그는 ‘국가지정민속마을이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가옥복원과 기반시설 확충 등 마을의 외적인 요소를 다듬고 발전시켜왔다면 올해부터는 내적인 부분을 보완해 한개마을의 정체성과 전통적이고 예술적인 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애쓸 것‘이라고 밝힌다.

“눈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올해는 경상북도 전통한옥체험프로그램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9월부터는 다도, 천연염색, 고택음악회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예산문제로 중단된 마을학교나 한문교실도 다시 열어달라는 요청이 많다.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한개마을의 전통밥상과 전통주의 명맥을 다시 이어가기 위한 작업은 물론 ‘나, 우리가족이 아니라 동네사람 모두 함께’라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는 한개마을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도 앞으로의 할 일이다. “한개마을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천천히 쉬어갈 수 있는 마을, 잠시 멈춰볼만한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개마을 문화농부가 그동안 뿌린 문화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 기대가 된다.

<가볼만한 곳>
◇세종대왕자 태실.. 전국 최대 장태문화 산실

세종대왕자 태실
세종대왕자 태실

예로부터 왕실에 아들이 태어나면 길지를 골라 그 태를 묻었다고 전해진다.

성주에는 세종대왕 18왕자와 원손 단종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다.

전국최대규모의 태실인 이곳은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생명문화공원내 태실문화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태실문화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당일은 휴관)

◇성밖숲…보랏빛 맥문동·푸른 왕버들의 조화

 

성밖숲
성밖숲 왕버들과 맥문동

성주 경산리에 있는 성밖숲은 수령 300~500년으로 추정되는 왕버들 55그루가 모여있는 군락지로 천연기념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8월이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왕버들의 신비로운 모습과 함께 나무 그늘 아래에 핀 보랏빛 맥문동을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201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하고, 2018, 2019년 대한민국 10대 생태테마관광지로도 선정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