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서경지 마을] 골목길 활력 불어넣은 예술 열정, 주민과 관광객 잇다
문화 지식 공유방 ‘문지방’
김강현 도예가 공방서 운영
예술 체험하고 마을 발전 논의
서예·민화…예술가 다수 거주
재능기부 통해 문화교실 열어
썰렁한 골목과 고단한 시간의 흐름에 묻혀 있던 안동시 태화동 서경지 마을이 지역 예술가들과 마을 주민들의 손길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발걸음을 멈춰세울 정도로 화려한 벽화, 골목을 산책하다 보면 만나볼 수 있는 도자기, 조각 작품은 마을 주민이 직접 참여한 예술 작품이다.
서경지 마을은 과거 ‘서경지’라는 커다란 못이 있었던 자리를 메워 논밭이었던 태화동 일대에 주택가가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안동시내 서남쪽 태화산 아래 자리 잡은 태화동은 한옥, 아파트, 현대식 상가건물이 혼재되어 있다. 한때는 안동시 인구의 10%가 거주하는 주거지역이었으나, 주변 옥동지역을 비롯해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마을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삭막했던 골목길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건 ‘예술’이다. 마을은 도예, 서예, 천연 염색 등 예술가들의 창작과 주민들의 뜨거운 열정이 만나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골목길은 색채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를 통해 변화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변화의 중심에는 아기자기한 골목 안, 물레가 돌아가고 도자기가 구워지는 현도예 공방의 ‘마을 문지방’의 역할이 컸다. ‘문지방’이란 단어를 사전에선 ‘출입문 밑의, 두 기둥 사이에 마루보다 조금 높게 가로로 댄 나무’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공방 입구, 나무 현판에 적힌 ‘마을 문지방’은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문지방은 사실 ‘문화 지식 공유방’의 줄인 말이에요. 마을 주민분들이 도예, 서예, 그림을 배우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의견을 나누는 곳입니다.” 공방 주인인 김강현 도예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속에는 마을 주민들이 공방을 사랑방삼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들어있는 듯하다.
마을 문지방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문화교실도 열린다. 서경지 마을은 안동 지역 예술가들의 둥지 같은 곳이다. 도예(현도예), 서예(우곡서예), 민화(여민공방), 가죽공방(메노라 가죽공방) 등 다양한 영역의 작가들이 마을 곳곳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천연염색, 규방공예, 민화, 칠화의 선구자로 천연염색 공예를 활성화시킨 상정 신계남 작가의 갤러리도 있다. 마을 예술가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이웃집골목 문화교실’이 열리고 이 곳에서 주민들은 다양한 예술을 직접 느끼고 배운다. 도자기 수업이 있는 날에는 비가 쏟아진 후 밖에 나갔을 때 맡았던 옅은 흙냄새가, 서예 수업이 있는 날은 깊은 묵향이 공방에서 골목 사이사이까지 널리 퍼진다.
문지방이 생기고 주민들이 문화 교실을 들으러 자주 모이게 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 또한 생겼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꼭 어릴 적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난 어릴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이제는 나이가 지긋한 60대가 됐지만, 꿈을 얘기할 때는 소녀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설렘이 느껴진다. 공방에서 작업을 하며 주민들의 다양한 꿈 이야기를 듣던 김강현 도예가는 2021년부터 마을에서 열리는 ‘꿈이 있는 서경지 골목길’ 축제를 통해 어릴 적부터 소망하던 주민들의 꿈 이뤄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작년에는 여군 중대장이 되고 싶었던 주민의 꿈이 이뤄졌다. 행사 당일 군복을 입고 한 해 마을을 잘 살펴달라는 부탁을 더해 명예 임명장을 수여했다. 올해는 화가가 꿈이었지만 먹고살기 바빠 그림 그리기를 멈췄던 주민의 꿈이 이뤄졌다. 그녀는 자신의 집 근처에 민화 공방이 들어오면서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그곳에서 틈틈이 다시 그림을 배웠다. 1년간 하나 둘 차근차근 그려 완성한 작품을 마을의 빈 가게 공간을 빌려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그녀가 평생 꿈꿔왔던 화가의 꿈이 비로소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예술 기쁨 나누며 공동체 의식↑
신계남 천연염색가 연구 기반
먹·감무늬염색 벽화에 오롯이
축제 열고 100m 천 물들이기
도시재생사업 선정 머리 맞대
마을에 거주하는 예술가와 주민들이 함께 모여 ‘어떻게 하면 구석구석 펼쳐진 작은 골목길을 재미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고 고민한 결과는 서경지 마을만의 독특한 벽화로 탄생됐다. 천연염색 장인 신계남 작가의 오랜 연구와 작품활동이 바탕이 되어 천연염색을 주제로 한 마을만의 특색 있는 벽화가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천연염색뿐만 아니라 먹, 감무늬염색 등 새로운 천연염색 방식이 그대로 벽화에 옮겨져 자연을 오롯이 담은 천연색의 아름다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오르막이 없고 사람이 드문 거리라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도 좋다. 아기자기한 골목에 그려진 벽화를 구경하며 걷다 보면 대문 앞에 달려진 각 집의 특색 있는 도자기 문패도 눈길을 끈다.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마을답게 문패에도 각자만의 개성이 문자, 그림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마을문지방에 주민들이 직접 찾아와 도예가의 도움을 받아 각자 하고 싶은 콘셉트를 정하고 흙을 파내며 만든 또 하나의 마을 작품이다.
마을 공동체가 운영해오고 있는 ‘꿈이 있는 서경지길, 문화로 놀 날’ 축제가 열리는 날에는 주민들이 모두 골목으로 나와 마을 전체가 웃음소리로 떠들썩하다. 마을 축제지만 방문객들이 함께 어울려 즐길 수도 있다. 지난 6월 열린 행사에서는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마을예술가들과 함께 목공, 서예 등 다양한 예술을 체험하고 직접 벽화를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100m 정도의 골목길을 쪽빛 염색으로 꾸미는 체험은 오로지 서경지 마을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이색적인 경험이라 인기를 끌었다. 서경지 8길을 따라 비닐을 깔고 광목천을 펼쳐 천연염색 장인 신계남 작가가 아침부터 직접 끓여 만든 쪽빛 염료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손을 보태 무늬를 내고 물감을 부어 천을 쪽빛으로 물들였다. 100m에 달하는 긴 천을 말리기 위해 전봇대 사이에 빨랫줄을 치고 감아놓으니 마치 마을 전체가 푸른색으로 물든 것 같은 또 하나의 그림 같은 풍경이 탄생했다.
서경지 마을은 주민자치활성화 공모사업과 문화교실을 통해 주민들은 예술의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며 공동체 의식을 높였다.
이제 이 작은 마을은 예술과 문화의 힘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이젠 더 큰 꿈을 향해 나아 갈 준비 중이다. 도시재생사업 선정을 통해 좀 더 쾌적한 마을 환경을 만들고 지역적 특색을 살린 마을이 되기 위해 주민협의체와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발전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구역도 서경지길, 태화길, 중앙로를 포함한 11개통(5~12, 28, 33~34통)으로 넓어진다. 문화적 삶이 부족하고 고령화된 골목 마을의 주민들이 스스로 향유할 문화를 찾고 어두웠던 골목을 밝히며 마을의 문제점을 직접 해결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도시재생사업과 연계되어 더 나은 마을을 향한 새로운 도약에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지현기·김민주기자
<우리 마을은>
김일현 태화동도시재생주민협의회 위원장, 김강현 도예가. “곧 마을 규모 커져…공동체 형성 또 고민”
“마을 문지방이 생기면서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10명 남짓의 주민들이 첫 모임을 가졌을 땐 서로 누군지도 잘 몰랐어요. 문지방이 매개가 되어 다양한 예술을 경험하고 기억 한편에 남아있던 꿈을 서로 공유하면서 친해졌어요” 2020년 서경지 마을의 빈집에 지금의 현도예 공방을 차린 김강현 도예가는 공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정에 감동해 마을 문지방의 문지기 역할을 자처했다.
“시골집을 공방으로 고치다 보니 공사가 컸죠. 시끄러울만 한데 공방 앞을 지나가다 마을의 역사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주민분이 계셨어요. 긴 공사가 끝나자 옆집 미용사는 개업 축하 봉투를 건넸죠. 마을의 대소사를 서로 챙기던 옛날의 훈훈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옛날부터 작가들이 모여 살면서 이웃들과 끼리끼리 어울려 노는 것이 꿈이었는데 드디어 이룰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그렇게 그는 예술이 공존하는, 깨끗하고 환한 마을이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시작된 ‘이웃집골목 문화교실’은 마을에 활력을 더했다.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니 처음에 관심 없던 주민들도 ‘내가 뭐 도와줄 것 없나?’ 하면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을문지방은 자연스럽게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고 꾸려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많은 지역 예술인들과 마을의 발전을 고민하고 있다. “대로변에서 3년 정도 공방을 운영하면서 깨달았죠. 이런 공방은 서울의 익선동처럼 골목 안에 있는 게 더 잘 어울린다는걸요. 앞으로 우리 동네로 더 많은 예술가들이 들어와 길 위에 누워있는 백화점이 되면 참 좋겠어요”
그의 바람은 마을에서 준비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수도 있다.
태화동도시재생주민협의회 김일현 위원장은 새로 확장되어 한 구역이 될 태화길, 중앙로 곳곳을 다니며 마을의 특색을 더할 부분을 찾고자 무더운 날씨에도 매일 같이 걷는다. 또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나 바람을 기록하느라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도시재생 성공의 조건으로 전문가들은 ‘사람과 정보가 모이는 장소, 또 그 장소와 사람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강조하죠. 우리는 이미 마을 문지방에서 모든 게 이뤄지고 있었어요. 이젠 마을의 범위가 넓어졌으니 또 다른 공동체 형성을 위한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게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어 걷기 좋은 인도가 만들어지고 밤길이 환해진다면 관광객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을을 찾아오게 될 것이다. 결국 지역 상권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고, 마을은 구경할 맛이 있는 곳이 될 것이다.
김민주기자 kmj@idaegu.co.kr
<가볼만한 곳>
◇임청각
임청각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500년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대종택이다. 임청각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임(臨)’자와 ‘청(淸)’ 두 글자를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임청각은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사람이 많이 나온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만들면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이 헐려 현재는 50여 칸이 남아있다.
◇월영교
월영교는 2003년 개통된 길이 387m의 국내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으로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아내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미투리 모양으로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리 한가운데에 월영정이 있다. 다리에 무지개빛 조명이 켜지는 야간의 풍경도 아름답다. 다리를 건너면 안동민속촌이 나타나고 왼쪽으로는 안동민속박물관이, 오른쪽으로는 안동호반 나들이길이 이어진다. 안동민속촌에서는 안동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마을의 전통가옥들을 만날 수 있다. 도토마리 집, 겹방집, 까치집 등 다양한 형태의 집 등은 민속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월영교 아래로는 문보트와 황포돛대 등 즐길거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