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석보면 포산마을] 고난의 역사 품은 고원분지,순례자·등산객 부른다.
신유박해 땐 신자들이 숨던 곳
이상동 선생, 교회 세워 독립운동
큰 일교차에 동해바람 불어와
고추·고랭지배추·콩 재배 딱
고추죽·미꾸라지 꼬장탕 별미
천주교 안동교구와 협력
을해 박해현장 머루산성 손질
탐방로 데크로드와 매트 설치
2022 경상북도 마을이야기-영양 석보면 포산마을
울창한 원시림과 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는 ‘삼의계곡’으로 가는 도로변에 ‘행복고도 600’이란 간판이 서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간판이다. 호기심이 많은 여행객들은 곧잘 그 곳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꼬불꼬불 산길이 계속 이어진다. 차량이 교행하기도 어려운 산길이다. 중간 중간에 마주 오는 차량을 피할 수 있는 대피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좁은 산길은 3km나 이어져 있다. 어느 순간 눈앞이 훤해 오면서 별천지가 펼쳐진다. 세상에 이런 곳에 마을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50만㎡(15만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원분지다. 흡사 강원도의 펀치볼을 연상시킨다. 펀치볼의 축소판 같은 영양군 석보면 포산마을의 모습이다. 산머루가 많다고 하여 머루산이라 불리다가 머루의 한자인 포를 차용하여 포산으로 불린다.
포산마을은 해발600m에 위치한 고원분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분지 중심부에 고산습지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주택과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가운데가 오목한 분지형 마을로 화채그릇(punch bowl) 모양을 하고 있다. 고도가 높지만 물이 흔해 농사를 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땅이다. 통상적으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의 고도가 해발 600~700m라고 한다. 유명 휴양지가 대부분 이 정도의 고도에 위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람들에게 쾌적함을 주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행복고도 600’의 의미를 알듯하다. 이 같은 조건에서 훼손되지 않은 환경을 간직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여기에 동해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온다. 밤에는 별빛이 함박눈처럼 쏟아진다. 여기에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이 더해진 곳이기에 감히 별천지라 부를만한 곳이다. 이 별천지에는 19가구 34명의 주민들이 생활한다. 1반인 포산마을에 9가구, 2반인 복골마을에 10가구가 있다.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포산마을로 오르는 중간에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부인 한재여 여사의 무덤이 있다. 친정나들이가 어렵던 시절에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쯤에서 만나 정을 나누었다는 반보기터도 있다.
포산마을은 고난과 역경의 땅이기도 하다. 5백여 년 전에 우씨 일가가 처음으로 들어와 화전을 일구면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 주민들의 피난지 역할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교우촌이 만들어졌다. 15년 뒤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 33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안동감영으로 이송됐다. 이때 20명은 풀려났으나 나머지 1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이때 순교한 ‘김시우 알렉시오’와 ‘이시임 안나’ ‘김강이 시몬’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복자로 시복되었다. 또 다른 2명도 가경자로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후에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교우촌은 사라졌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항일투장을 하면서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3.1만세 운동 때 이곳 주민들이 가담하면서 왜경의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전후에는 공비들의 출몰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독립운동가 이상동 선생이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상동 선생은 항일명문가인 안동 임청각의 이상룡 선생의 친동생이다.
현재 영양군에서는 천주교 안동교구와 협력해 을해박해의 현장인 머루산성지를 정비하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전하고 있다. 정자와 쉼터를 조성하고, 성지역사탐방로를 설치했다. 8백m에 이르는 탐방로는 데크로드와 야자매트를 설치해 성지 순례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2차로 성모동산 조성사업도 준비 중이다. 탐방로 주변에는 3백 그루의 머루나무를 심어 머루산의 이미지를 브랜드화하고 있다. 앞으로 머루가 성장하면 머루터널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천주교 안동교구와 자매결연도 맺었다. 마을에선 성지를 관리하면서 성지순례를 돕고, 교구에서는 이곳 농산물을 우선 구매하는 윈윈전략이다. 독립운동가 이상동 선생이 건립했던 교회를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포산마을에서는 고추와 고랭지배추, 콩을 많이 재배한다. 뚜렷한 계절의 변화와 고지대의 심한 일교차,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함유된 미네랄 성분 덕분에 포산마을의 농산물은 고품질 농산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동해와는 직선거리로 20km에 불과하다. 특별한 먹거리도 있다. 어렵던 시절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었던 고추죽이 대표적이다. 맷돌에 간 통고추를 끓이다가 밀가루를 풀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포산마을 만의 특별한 먹거리다. 이제는 밀가루 대신에 찹쌀을 쓰고, 버섯과 쇠고기를 넣어서 끓인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맛과 영양을 보강한 먹거리다. 마을 습지에서 잡은 미꾸라지에 고추장을 넣고 끓인 ‘꼬장탕’도 있다. 꼬장은 고추장의 이곳 사투리다. 포산마을의 특성상 비탈 밭이 많아 평지보다 2~3배의 힘이 드는 농사일을 견뎌내기 위해 만든 지역 특유의 먹거리라고 할 수 있다.
‘행복고도 600’이란 슬로건과 함께 포산마을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외지 탐방객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비한 마을 정비사업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3km에 이르는 좁은 산길은 탐방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었다. 특히 초보 운전자들에게는 넘기 힘든 장애물과 같았다. 2021년 1차 진입로 확장공사를 추진해 1.5km 구간을 확장했다. 나머지 구간에 대한 2차 사업도 준비 중이다. 단체 관광객을 위한 대형차량 주차장도 마련했다. 특히 머루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이 보다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을 주변 산들을 연결하는 명품등산로 정비사업도 1단계를 마무리하고 2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완공되면 포산마을을 중심으로 머루산과 삼의계곡을 아우르는 명품 트래킹코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을 중심부에 소공원과 주차장도 만들었다. 탐방객들에게 주차 공간과 쉼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소공원에서는 작은 음악회도 열린다. 인근 문화예술인들의 재능기부 방식으로 개최된다. 지금까지 3회의 음악회가 열렸다. 소공원에 비치된 피아노는 탐방객들이 직접 연주 할 수도 있고 포토존으로도 활용된다. 마을 내 습지에는 연꽃단지도 조성되어 있다. 이 같은 정비사업을 통하여 행복고도 600 포산마을은 볼 거리와 먹을 거리 머물 거리가 있는 명품 마을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춘기자·강현수필가
우리 마을은
유철균 포산리 이장…”보고 먹고 쉴 수 있는 힐링 공간으로”
“여태껏 보물 속에서 살면서 그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 보물을 갈고 닦아 좀 더 빛나는 보물로 만드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라는 말로 유철균(54) 이장은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유 이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곳 포산마을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포산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인근에 있는 천마가공회사에서 20년간 일했었다. 2019년부터 마을 이장을 맡아 마을을 가꾸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포산마을의 슬로건인 ‘행복고도 600’에 걸맞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마을, 소득이 있는 마을로 만들어 관광객과 주민들이 모두 행복한 마을을 만들겠다는 것이 유 이장의 꿈이다.
우선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3km의 진입로 1차 확장사업을 마무리하고 2차 확장사업을 준비 중이다. 단체 관광객을 위한 대형 주차장도 마련했다. 마을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명품등산로와 성지역사탐방로도 개설했다. 성지역사탐방로에는 300그루의 머루나무도 심었다. 마을 중심부에는 소공원을 만들어 작은 음악회도 열고 휴식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지금까지 3회에 걸쳐 작은 음악회도 열었다. 마을 늪지에 연꽃을 심고 밭에는 국화와 천일홍을 심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유 이장은 포산마을을 ‘보고 먹고 쉴’ 곳이 있는 힐링의 공간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추진했던 마을기반 정비사업도 이 같은 큰 계획의 일부다. 앞으로는 먹거리와 쉴 공간의 마련에 주력할 방침이다. 마을의 특별한 먹거리인 고추죽과 꼬장탕을 현대적 입맛에 맞도록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먹거리도 개발할 계획이다. 마을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연산 식재료들을 활용한다는 생각이다. 우선 함암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머위와 화살나무를 이용해 치유와 맛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이용해 ‘식치마을’을 만들 계획이다. 식치마을은 음식을 통하여 심신을 치유하는 마을이라고 한다. 예전의 담배 건조장을 복원한 황초굴 민박도 계획하고 있다. 이런 사업을 통하여 포산마을을 보고 먹고 즐기면서 머무를 수 있는 마을로 만든다는 큰 그림이다.
강현수필가
가볼만한 곳
◇ 두들마을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개척한 마을로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 입구 바위에 낙기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배고픔을 낙으로 삼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갈암 이현일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기년예설’을 비판하고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노론세력에 대항한 것이다. 이현일은 노론으로부터 ‘명의죄인’으로 낙인 찍혔다. 죄를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 죄인이라는 말이다.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이후 두들마을의 재령 이씨들은 200여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도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을에는 석계고택과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 채가 있다.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계향을 기리는 유적비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이 있다. 교육원에서는 음식디미방 식사체험과 음식만들기 체험, 전통주 만들기 체험, 전통문화체험, 한옥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을에는 3백년 된 상수리나무 수십 그루가 있다. 흉년이 들었을 때 구황식품으로 쓰기 위해 심은 것이다. 이 상수리나무들은 여중군자로 불리는 장계향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계향은 마을을 개척한 이시명의 아내이자, 단기필마로 노론세력에 맞섰던 이현일의 어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