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보다 도수 낮은 ‘은자골탁배기’
술 빚는 과정 전통방식 그대로 유지
잡스러운 맛·향 깨끗하게 걸러내
2007년 전국 최초로 이마트 입점
2016 우리술 품평회서 최우수상
해마다 2천여명 관광·견학 방문
금척·은척 관련된 재미난 설화도
“새 상주곶감막걸리, 추석에 출시”
동학계 종교유물 1천점 보유

상주시 은척면 소재지이면서 은척양조장이 있는 봉중리 일원. 왼쪽 아래에 은척면행정복지센터가 있고, 그 위쪽으로 잔디 운동장이 있는 은척초등학교와 은척양조장이 나란히 보인다. 가운데 높은 산이 성주봉이다.전영호기자
상주시 은척면 소재지이면서 은척양조장이 있는 봉중리 일원. 왼쪽 아래에 은척면행정복지센터가 있고, 그 위쪽으로 잔디 운동장이 있는 은척초등학교와 은척양조장이 나란히 보인다. 가운데 높은 산이 성주봉이다.전영호기자

 

2019 경상북도 마을이야기 – 상주시 은척면 은척양조장

60~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억 중 하나가 막걸리 심부름이다.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되 받아 돌아오는 길에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한 모금 홀짝 했던 순간, 그리고 혹시 들키지 않을까 두근거리던 가슴과 목구멍을 넘어가는 그 시금털털한 맛과 금기를 깬 묘한 쾌감을 기억한다. 그 세대 사람들 대부분은 술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 막걸리였을 것이다.

‘은자골 생탁배기’를 만드는 상주시 은척면 은척양조장을 방문한 손님들은 막걸리와 관련된 각자의 재미있는 기억들을 함께 나누며 추억을 떠올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막걸리는 우리나라 전체 주류 판매량의 70%를 넘을 정도로 우리 생활과 밀착된 술이었다. 막걸리는 80년대 이후 맥주와 소주에 밀려 쇠퇴일로를 걷다 2000년대 후반부터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은척의 작은 양조장이 일으키고 있는 바람은 자못 신선하다.

은자골 탁배기는 2007년 전국 최초로 이마트에 입점한 막걸리다. 또 2016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주최·주관하는 우리술 품평회에서 생막걸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은자골 탁배기는 “음용 후 머리가 맑고 뒤끝이 깨끗한 술이며, 밀이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특유의 텁텁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다.

발효실
발효실에서 익어가고 있는 은자골생탁배기.

은자골탁배기는 시중의 보통 막걸리보다 알콜도수가 1도 낮은 5도다. 그러나 싱겁다는 느낌이 아니라 잡스러운 맛과 냄새를 깨끗하게 걸러내 단단한 술이라는 느낌을 준다. 은자골생탁배기는 직접 고두밥을 짓고 전통 누룩으로 충분한 발효를 거치는 등 술 빚는 과정은 전통방식을 그대로 지키며 만들고 있다. 그래서 출고하기까지 시간은 더 걸리지만, 술은 부드럽고 마신 뒤에 두통이 없다는 게 은척양조장 임주원 대표의 설명이다.

임대표는 시아버지인 이동녕(1910~1994) 창업주로부터 은척양조장을 물려받았다. 이동녕 창업주는 1948년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은척고등공민학교를 개설해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등 독지가로 이름이 높았다. 이 학교는 은척에 공립중고등학교가 생길 때까지 27회 76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이동녕 선생 사후에 건립한 공적비가 마을에 서 있다.

처음에 임 대표는 물려받은 양조장을 처분하려고 했었다. 자신이 기독교 신자인데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아버지께서 막걸리 맛이 어떤지 솔직히 말해보라고 해서 ‘구정물 같아요’라고 대답해서 혼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누룩황토방
누룩황토방.

그런데 우연히 미생물학자인 경북대 교수가 임 대표 집을 방문해 물을 마시고는, 술빚기에 안성맞춤인 물이라며 임 대표에게 막걸리 제조를 제대로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그 교수가 자신도 장로라면서, 막걸리는 술이라기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음식이고 문화라는 말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임 대표는 ‘구정물’ 같은 맛을 없애는 대신 상큼하고 청량감 있는 막걸리를 만들기로 하고 술맛을 다듬어 갔다. 지하 102미터 암반수와 상주 삼백쌀 등 좋은 재료와 전통누룩을 사용해 정성을 다해 빚어냈다. 그렇게 완성된 술에 임 대표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저 시금털털한 이름 없는 막걸리가 ‘은자골탁배기’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막걸리 좀 마셔봤다 하는 사람은 은자골탁배기를 안다. 그런데 은척은 처음 들어본다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은자’라는 말이 은척(銀尺)을 우리말로 푼 것이라고 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은척양조장은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됐다. 전국에 수많은 양조장 중 지금까지 38곳만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됐다. 2015년에는 경북도 향토뿌리기업, 농림축산식품부 6차산업 인증도 받았다. 해마다 전국에서 2천여명이 은척양조장을 찾아와 양조장을 견학하고, 갓 빚은 은자골생탁배기와 안주로 내놓는 가죽나물이 든 장떡을 맛본다. 그리고 인근 상주동학교당을 둘러보고 성주봉자연휴양림, 성주봉한방사우나에서 힐링을 하고 돌아간다. 또 성주봉자연휴양림과 한방산업단지를 찾아온 사람들도 은자골탁배기를 찾아 양조장으로 온다.

은척양조장-전경22
은척양조장과 야생화동산.

임주원 대표의 동생인 임희주 부사장은 양조장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제일 먼저 은척이 왜 은척인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그리고는 은자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신라에 금과 은으로 만든 자(尺) 금척, 은척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금척이나 은척에 키를 재고나면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죽은 사람도 살아났다. 해마다 인구는 늘어나기만 하는데 식량이 부족해지니, 왕이 회의를 열어 금자는 경주 건천읍 금척리 금자산에 은자는 상주 은척면 은자산에 묻었다. 상주동학교당에서 성주산자연휴양림으로 가다 왼편에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이 바로 은자산이다.

방문객들을위한체험공간1
방문객들을 위한 체험 공간.

세종실록지리지에 ‘은척소(銀尺所)’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은척은 은을 다루는 수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에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경주의 금척과 상주의 은척은 경주와 상주에서 경상도라는 이름의 유래된 것과도 들어맞고, 주민들의 바람도 읽을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은척양조장에서도 양조장 마당에 조성해 놓은 야생화동산에 은자 조형물을 만들고, 은자 찾기 프로그램, 은자골 설화를 담은 소책자 제작 등을 은척과 은자골탁배기를 알릴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은자골생탁배기와 은척은 6차산업으로 2인3각 달리기를 하는 셈이다. 이재수·김광재기자

“새 상주곶감막걸리, 추석에 출시”, 임주원 은척양조장 대표

 

“새로운 상주곶감막걸리를 이번 추석에 출시해요. 동결건조한 상주곶감 분말을 섞어 발효시켰습니다. 곶감의 단맛을 살리고 인공감미료를 전혀 첨가하지 않았어요. 무감미료 곶감막걸리라고 하니 서울에서도 연락이 많이 오는데, 효모가 살아있는 생막걸리라서 유통이 어려워요. 그래도 발효식품 막걸리에서 효모와 효소를 없애는 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요. 막걸리는 우리 문화잖아요.”

은자(은척)라는 지명을 브랜드화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은척양조장 임주원 대표의 말에서는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은자골생탁배기도 전통 누룩과 살아있는 효모를 고집한다. 일부 양조장에서 보존기간을 늘리기 위해 보존료를 첨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은척양조장은 보존료를 일절 쓰지 않는다.

평일 오후 이른 시간인데도 양조장 직원들이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필요한 작업이 끝나서 다들 퇴근했다고 한다. 근무시간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등 여러 가지 근무여건이 좋은 편이어서 이직하는 직원이 없다고 한다.

또 은척양조장은 정직한 막걸리로 번 돈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기업이다.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대한적십자사 희망풍차 나눔사업장, 상주연탄은행 후원의 집을 비롯한 각종 봉사단체 지원과 장학금 지원, 장애인 후원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앞으로는 유통기한이 자유로운 증류주를 만들어서 수출도 해보고 싶고, 제가 우리밀로 만드는 통밀주 제조 특허를 갖고 있는데 그것도 상품화하고 싶어요. 또 양조장 부근에 발효빵 카페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도 있어요. 저 혼자만을 위한 욕심이 아니니까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가볼만한 곳

상주동학교당1
 

◇상주동학교당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워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이 개입하게 된다. 동학군이 우금치 싸움에서 크게 패하면서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시하자 도통 전수에 불만을 품은 원로들이 각기 독립된 교당을 설립해 많은 분파가 생겼다. 남접주 김주희(1890~1944)는 최제우 동학을 체천사상으로 체계화시키고 1910년 상주시 은척면에 들어와 1924년 동학교당을 창건했다. 동학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벌이며 적극적인 포교에 나서 교세가 상주, 문경, 예천, 영풍, 안동 등 경북을 중심으로 충북 강원도까지 미쳤다.

1999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된 상주동학교당은 튼 입구자로 배치된 초가집 4채와 사당, 유물전시관, 포덕원 등 10채가량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중심건물인 북재(원채)는 성화실로 사용했고, 나머지 동재, 서재, 남재는 접주실과 남녀교도의 거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동재는 건물을 세로로 길게 나눠, 양쪽의 정면이 같은 모양이 되도록 지었다. 이를 태극건법 또는 음양건법이라고 하는데 우주의 원리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 동학교당 유물은 당시 포교를 하면서 사용했던 것이다. 교기, 의예복, 전적, 가사, 판복, 인장, 생활용품 등 모두 1천여 점으로 일제에 압수 당했던 것을 회수한 것이 대부분이다. 동학계 종교유물은 천교도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전국에서 상주동학에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