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발갱이들마을] “모를찌세 모를찌세~”…선조들 한 서린 노동요 맥 잇는다
2020경상북도 마을이야기 – 구미 발갱이들마을
1960년대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된 이래 구미는 전자반도체사업의 중심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공업도시로 각인되어 있다. 10월 중순의 어느날 찾은 구미는 그간 알았던 산업도시와는 또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도로 옆으로 넓게 펼쳐진 논에는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있고 일부 추수를 끝낸 들에는 거대한 마시멜로 같은 하얀색 덩어리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이 덩어리들의 정체는 볏집을 비닐로 밀봉해 발효시켜 사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곤포 사일리지라고 부른다. 구미는 지리적으로 볼 때 도시의 중심부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전까지만 해도 농업이 산업의 주축이었다.
낙동강이 동으로 흐르는 지산동도 마을 앞에 넓고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성스러운 곳에서만 자란다는 영지가 뒷산에서 돋아나 마을 이름을 지산이라 했으며 서원 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원앞마을과 왕버들숲 우거진 강가에 둑을 쌓았다해서 삽제로 부르는 두개의 자연부락이 합해진 마을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들은 발갱이들로 불린다.
마을 이름의 유래
왕건-신검, 지산동 앞들서 결전
왕건, 검으로 후백제군 발본색원
이후 발검들→발갱이들 바뀌어
발갱이들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구미에서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의 최종 결전이 펼쳐졌다. 지산동 앞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왕건이 드디어 신검의 부대를 물리치게 된다. 이때 왕건이 후백제군을 검으로 발본색원했다 하여 발검(撥劒)들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후세로 이어지면서 발갱이들로 바뀌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던 70년대까지만 해도 140~150가구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지금처럼 3·4인 가구가 아니라 보통 한가구에 6·7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대식구가 함께 지내던 시절이었으니 마을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후 구미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자녀들이 공단에 취업을 하는 등 마을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주민들도 많고 토박이의 비중도 다른 마을에 비해 많다. 예전에는 수박농사도 많이 지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벼농사를 주로 짓는다. 간간이 송어양식장도 눈에 띈다. 이곳 지하수에 철분이 없어서 송어를 키우기에 적합한 까닭이라고 한다. 도시의 중심에 있지만 여전히 옛 전통을 많이 간직하고 있고 인심도 좋은 것이 자랑이다.
노동요 ‘발갱이들소리’
80년대 방송 타면서 관심 끌어
전문가 도움으로 10마당 채록
경북 무형문화재 27호 지정
이 마을에서는 발갱이들에서 고된 농사일을 잊기 위해 함께 부르던 노동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소리에는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부르던 절절한 신세한탄도 담겨있고, 풍작의 기쁨에 풍물패를 앞세우고 덩실덩실 춤추며 신명나게 뽑아내던 가락도 담겨 있다. 이 소리는 마을 어른들의 입을 통해 세대를 따라 이어져 내려오며 서서히 잊혀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던 중 80년대 초 한 방송을 통해 소개가 되며 관심을 끌게 되고 1991년에 이르러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발갱이들소리 10마당이 채록이 된다. 그해 10월 제 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경북대표로 출전해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전국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99년 4월에는 농요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 27호로 지정을 받게 된다.
발갱이들소리는 첫째마당인 ‘신세타령(어사용)’을 시작으로 ‘가래질소리’, ‘망깨소리’와 ‘목도소리’ 등 농사꾼들이 나무하거나 풀 벨 때 부르던 노래부터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 ‘타작소리’ 등 농사의 순서에 따라 부르던 노래 ‘치나칭칭나네’와 같이 상머슴을 걸채에 태우고 흥겨운 칭칭이 소리를 부르며 행진하는 노래, 그리고 ‘베틀소리’ 등 총 10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사람이 앞소리를 매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아 부르는 형식이다.
“모를찌세 모를찌세/ 이모판에 모를찌세/ 들어내세 들어내세/ 이모판을 들어내세” 모판에서 모를 쪄내면서 부르던 모찌기 소리다. 모찌기는 못자리에 볍씨를 뿌려 어느 정도 자라면 모를 뽑아 묶어 논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렇게 모찌기를 하면 여러 사람이 줄을 서서 모를 심었다. 모찌기, 모심기, 타작하기 등 농사의 과정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품앗이 형태로 서로 힘을 합해야만 됐다. 이러한 공동작업을 위해서 함께 부르던 들소리가 바로 발갱이들소리다.
유지·전수에 ‘온힘’
보유자·전수조교·이수자
단원들 주1회 꾸준히 연습
매년 5월 정기발표회도 가져
지금은 농사도 모두 기계화가 되어 발갱이들소리 10마당의 정취를 제대로 알 수도 없다. 그런만큼 지켜내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발갱이들소리 보존회를 만들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조상의 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무형문화재 1대 보유자인 고 백남진 옹의 뒤를 이어 2대 이숙원 씨, 3대 윤수호 씨로 이어지고 있는 발갱이들소리는 현재는 보유자 외에 1명의 전수조교, 5명의 이수자를 포함한 40여명의 단원들이 함께 한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배우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만 다들 생업 때문에 바쁜 탓에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해 결국은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남아있는 단원들의 평균연령은 60대다. 단원들은 매주 1번 이상씩 모여 함께 발갱이들소리를 한다.
2010년 현재의 전수관이 개관하기 전까지는 지산동 샛강에서 연습을 했다. 야외라 비, 바람, 더위, 추위 등과 싸워야 했다. 지산동에서 발원한 소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존회 회원들은 매년 5월 마지막 토요일 전수관 야외공연장에서 정기발표회도 연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를 거듭하다 11월 7일 비대면무관중으로 열릴 예정이다.
1년에 4·5회이상 강릉, 순천, 예천, 해남 등 전국의 농요단체와 교류공연도 펼친다. 터키와 베트남 등 해외 공연도 다녀왔다. 단복이 삼베옷이라 타지역 공연을 갔을때 상복으로 오해를 받은 일도 있다고 한다.
발갱이들 앞에는 발갱이들소리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5월이면 풍작을 기원하며 보존회 회원들이 모여 고유제를 지낸다. 소리를 함께 부르며 힘든 농사일을 이겨냈던 전통은 이제는 보기 힘들지만 지산동에서 발원한 소리를 지켜나가겠다는 자긍심은 발갱이들소리를 잊혀진 소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있다.
최규열기자·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젠 삶의 일부죠” 이수일 구미발갱이들소리 보존회 이사장
“지산 발갱이들마을은 발갱이들소리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요.”
이 마을에는 선대부터 이어져온 소리를 지키고 보존한다는 사명감에서 대가도 없지만 매주 한두번씩 모여서 소리를 하는 40여명의 발갱이들소리보존회 회원들이 있다. 이수일 이사장 역시도 그렇다. 2001년 처음 합류를 할때만 해도 50대였는데 어느새 70대가 되었다.
홍승표 사무국장 역시 발갱이들소리 보존회 회원이었던 부친의 뒤를 이어 2006년부터 자연스럽게 합류를 해 지금은 보존회 살림까지 맡고 있다. 회원 대부분이 2000년대 초반부터 함께 하고 있단다.
처음 발갱이들소리가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을 때만해도 회원들의 평균나이가 70세가 넘었다. 젊은 사람들이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50대 초반에 소리를 시작했지만 어느새 두사람도 그때 어르신들의 나이에 이르렀다. 지금 회원들의 평균나이도 60대중반에 이른다.
“처음부터 좋아서 했던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지 않으면 선조들의 애환과 한이 서린 이 소리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사명감으로 시작한 소리가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가볼만한 곳>
◇지산샛강생태공원
지산을 흐르던 샛강은 구미공단 조성으로 물길이 줄어 습지가 되었다. 지산샛강생태공원은 습지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아름다운 생태공원으로 재탄생한 시킨 곳이다. 봄에는 벚꽃, 여름엔 연꽃, 가을에는 갈대, 겨울에는 철새가 날아들어 계절마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순환산책로와 수변관찰데크, 전망대를 갖추고 있어 부담없이 산책하기에 좋다.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천연기념물 수달과 겨울이 되면 찾아오는 고니를 비롯 멸종위기야생식물 가시연꽃도 볼 수 있다. 2015년부터는 연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지산샛강생태문화축제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