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과 비봉산 우뚝 솟아
경관 수려한 영천이씨 집성촌
이태직·이민성 등 인물 배출
학록정사·운곡당·점우당 등
문화재·전통가옥 많이 남아
유서깊은 양반마을 정취 물씬

산운마을-전경2
금성산 자락의 산운마을은 450년 전통을 이어온 영천 이씨 집성촌이다.

 

2019 경상북도 마을이야기 – 의성 산운마을

금성산 꼭대기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사면은 포물선처럼 날렵한 느낌이다. 그 오른편으로 보이는 산은 봉황을 닮았다고 하는 비봉산이다. 평지에 우뚝 솟은 듯 보이는 이 두 산봉우리를 떼어놓고 산운마을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옛 산운초등학교 터에 조성한 산운생태공원이 또 다른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1926년 개교해 3천7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5년 3월 폐교된 학교다. 2006년 개관한 산운생태공원은 산운마을의 유래와 민속유물을 전시한 마을자료관과 야외 생태학습 및 공룡체험을 할 수 있는 생태공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1층 전시실은 지진과 화산활동, 생명의 기원과 지구의 탄생, 동·식물의 분류, 공룡 연대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2층 마을자료관에서는 산운마을의 유래와 산운마을이 배출한 인물의 일대기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야외에는 연못과 공룡모형으로 잘 꾸며져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공룡을 테마로 한 것은 금성산이 백악기에 폭발한 한반도 최초의 화산이기 때문이다. 천연잔디가 깔린 운동장은 유료로 대여도 해준다.

산운생태공원이라고 새겨진 큰 선돌 표석을 지나 공원으로 들어가면 이순신 장군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충무공상은 1975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대구에 있는 동문 일동이 건립했다고 새겨져 있다.

전시관 정면 양쪽에는 큰 돌에 시가 한 편씩 새겨져 있다. 하나는 산운마을 출신의 애국지사 경산 이태직(1878~1913) 선생이 우국 충정을 담은 시 ‘동포에게 고함’이다. 이태직 선생은 을사늑약, 경술국치 시기에 월남 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나라를 되찾는 일에 생애를 바쳤다. 일제에 의해 갖은 고초를 겪다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수정사
수정사

또 하나는 산운마을 출신 경정 이민성(1570∼1629)의 숙봉산동촌에서((宿鳳山東村)이다. 1623년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 황해도 봉산에서 자며 들은 어떤 할머니의 하소연을 담고 있다. “지난해 외동아들 군사로 뽑혀갔소/총 메고 요동으로 건너갔는데/거기서 우리 군사 모조리 죽었다니/어느 싸움터에 백골로 묻혔는지/이 늙은 게 온자라면 벌써 죽었으련만/어린 손자 놈을 맡겨둘 데 없구려/지난 겨울 말 탄 병정 수백이 달려와/겁탈해 가는 것이 적병보다 더 했수다/간장독 장단지 다 긁어갔으니/양식인들 한 알이나 남겨 뒀겠소” 이민성은 이런 하소연을 듣고 “오오 슬프도다! 이 일을 어이하는고/만천하에 이런 사정 어찌 한 집뿐이랴”라며 눈물을 흘린다. 시비 아래에는 조선 한시 중 리얼리티가 가장 뛰어난 시로 평가된다는 해설이 적혀 있다.

이 시비의 인물들을 배출한 산운마을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 이씨 집성촌이다.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1531~1609)이 1550년대 비봉산 기슭 소시랑리에 터전을 잡았다가 1609년 지금의 산운리로 옮겨왔다. 경정 이민성과 자암 이민환(1573~1649) 등 그의 두 아들도 대과에 급제하여 삼부자 급제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현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운곡 이희발(1768~1849)도 이 마을 출신이다.

지금도 산운마을에는 학록정사, 운곡당, 소우당, 점우당 등 지정 문화재와 전통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237호 소우당은 안채 서쪽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조성한 정원이 일품이다. 안사랑채 또는 별당으로 불리는 건물과 각종 나무, 연못이 어우러져, 시공간을 떠난 비현실적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다. 연못도 사각 연못과 둥근 섬이라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형태가 아닌, 어디서도 연못의 끝이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설계했다. 이 별당 건물을 포함한 소우당의 여러 방에서는 숙박도 할 수 있다.

학록정사
학록정사

운곡 이희발이 건립한 것으로 전하는 운곡당과 1900년경에 건립한 점우당 등 문화재들도 잘 보존돼 있다. 새파란 잔디가 깔끔하게 정리된 고택들을 둘러보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다.

학록정사는 영천 이씨 입향조 학동 이광준 선생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750년 경에 건립했다.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학록정사의 현판은 표암 강세황의 글씨다. 강당 뒤 광덕사(光德祠)는 이광준, 이민성, 이민환의 삼부자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학록정사 옆에는 후손들이 산운입향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해 2015년 건립한 세 사람의 비도 서 있다.

농산물 수확 체험 같은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농촌 양반마을의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마을이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고샅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면 멋진 산봉우리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는 곳이다. 그 산속으로 들어가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수정사 절이 있다. 이 절도 마을만큼 고즈넉한 분위기다. 이 마을 고택에서 묵으며 금성산, 비봉산, 수정사 그리고 빙계서원과 빙계계곡을 둘러보면 알찬 여행이 되겠다.

김병태·김광재기자

“고풍 살아있는 곳…차분히 즐기다 가시길”, 이원갑 이장

산운마을-이장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 반촌인 산운마을은 지금도 주민 대부분이 영천 이씨로 구성된 집성촌이다. 이 마을도 여느 농촌마을처럼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나중에는 마을이 사라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한다. 주민들이 나이가 많아 농사를 짓지 못하니, 그나마 마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마을 농사를 도맡아서 짓고 있다.

과수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원갑 이장(53)과 어렵게 통화가 됐다. 기계 소리가 시끄러워 전화기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면서 회관으로 오겠다고 한다.

산운마을은 80가구 170여명 주민이 있지만, 실제로 마을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은 70~80명 정도이다. 이원갑 이장은 ”한집안 사람들이 마을에 모여 사는 게 마을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다“고 한다. 현재 65세 전후까지 젊은 사람이 20명가량 된다“고 한다. 마을 단위로 사업을 하려고 해도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웃 마을에는 도시에서 귀농, 귀촌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데 우리마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택이 즐비한 양반 동네이다 보니 오히려 귀촌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마을에서 하는 특별한 사업은 없지만, 우리 마을에는 산운생태공원이 있고 고택과 금성산, 비봉산 그리고 수정사 등 차분하게 즐길 수 있는 관광자원은 많습니다. 조문국사적지와 빙계계곡도 가깝고요.”

그러나 산운마을의 진짜 자랑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듯하다. 이 마을 출신인 사람들이 부모에게, 어르신들에게 잘한다고 한다. “부모님 뵈러 고향에 오는 젊은 사람들이 꼭 경로당에 들러 마을 어르신들께도 인사드리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입향조로부터 4백50여 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마을답게 산운마을은 고풍이 살아있는 마을이다.

가볼만한 곳

◇금성산

530m로 그리 높지 않으나 한반도 최초의 화산으로, 정상에 넓은 평지가 형성돼 있다. 이 정상의 평지는 천하의 명당이어서 조상 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 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산에 올라 암장한 묘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조문국 시대에 축성한 금성산성과 기마병을 훈련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마주 보고 있는 비봉산(672m)과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성산으로 올라 비봉산을 거쳐 내려오는 말발굽 모양의 환종주 코스는 6시간 정도 걸린다. 그밖에도 2~4시간의 여러 등산코스가 정비돼 있다.

◇수정사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선조 때는 사명당 유정대사가 머무르면서 승병의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대광전은 돌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보통 대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주불이지만, 수정사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수정사라는 이름은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인데, 산운마을은 이 수정사가 있는 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이라 했다고 한다.

산운마을-전경5
산운마을 전경. 전영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