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유기마을] 조선시대 유기생산 중심지…대중화로 옛 명성 찾는다
양질의 숯·입자 고운 진흙
유기제작에 유리한 환경조건
한때 전국 수요 70% 차지
일제 수탈·양은그릇 보급 등
시대 변화에 쇠퇴의 길로
고해룡·김선익 두 장인 노력에
현재까지 유기제작 명맥 유지
2018 경상북도 마을 이야기- 봉화 유기마을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이 1964년에 쓴 시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인이 놋주발과 추억을 연결한 것은 둘 다 ‘쨍쨍 울린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겠지만, ‘놋주발’은 당시에도 이미 역사나 추억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단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놋그릇이 실생활에서 밀려난 지가 벌써 5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봉화군 봉화 삼계2리 유기마을도 시대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지금은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함께 지정을 받은 ‘봉화유기’와 ‘내성유기’ 두 공방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 마을에서 처음 유기가 제작된 것은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곽씨와 맹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와 유기를 제작하면서 마을이 크게 번성해, 새로 흥한 마을이라는 뜻의 ‘신흥리’로 불렸다. 이 마을이 유기마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양질의 숯을 구하기 쉽고 내성천의 입자 고운 진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성기에는 이 마을 70가구 중 30~40집에서 유기를 만들어 ‘쨍쨍한’ 놋점거리를 형성했다. 안성유기는 서울 양반가에서 사용하는 유기들을 도맡아 만들었기 때문에 유명했지만,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봉화가 전국의 유기 수요의 70%를 차지할 만큼 우리나라 유기 생산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공출이란 이름으로 유기를 비롯한 쇠붙이를 약탈해 가자 유기공방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몇몇 장인들은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 작은 그릇들을 만들어 복대에 숨겨 나와 팔기도 하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을을 떠나가거나 농사로 전업을 했다. 광복 후 유기제작이 재개되면서 봉화의 유기공방도 한때 활기를 띠었으나, 60년대 접어들면서 유기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값싼 스테인레스, 양은 그릇이 보급되고 연탄을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나자 연탄가스에 약한 유기는 식당과 가정에서 밀려났다. 봉화의 유기공방도 맥이 끊기고 말았다.
봉화의 유기가 다시 맥을 잇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 ‘봉화유기’의 3대 고(故) 고해룡 유기장이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 유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 후 ‘내성유기’의 김선익 유기장도 집 헛간을 개조해, 예전에 일하던 마을의 기술자 한 사람을 두고 다시 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영영 사라질 뻔했던 봉화의 유기는 두 장인에 의해 이어져 1994년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가)와 (나)로 함께 지정을 받았다. ‘봉화유기’는 1대 창업주 고창업, 2대 고해룡, 3대 고태주까지 ‘내성유기’는 1대 김용범, 2대 김대경, 3대 김선익, 4대 김형순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다시 불씨를 살린 봉화의 유기는 15년 전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때 인기를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유기는 전반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김선익, 고태주 두 유기장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제사에 대한 관념도 예전 같지 않아 일반 가정의 유기 제기 세트 수요도 점점 줄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멋과 여유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유기의 보온·보냉 효과와 살균력이 알려지면서 웰빙 식기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같은 음식이라도 유기그릇에 담아내면 더욱 정성스러워 보인다. 봉화의 두 장인이 이러한 유기의 장점을 극대화해 유기이 대중화에 성공한다면, 삼계리 유기마을은 다시 한번 ‘새롭게 번성하는 마을’로 불리게 될 것이다. 김교윤·김광재기자
“후손들이 가업 잇는게 마지막 소원”
김선익 내성유기 대표
“어릴 때 조부로부터 유기제조법을 배워 익혔고, 1961년 군에서 제대 후 논밭을 팔아서 다시 유기제작을 시작했는데, 유기가 연탄가스에 약하고 스탠그릇에 밀려 몇 년을 하다가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어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때 저 말고 남씨집과 권씨집도 있었는데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내성유기 김선익(83) 유기장은 1980년대 다시 공방을 열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내성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봉화읍에 속하기 전 지면이 내성면에서 따온 것이다.
김선익 유기장은 또한 지난 1973년부터 이장직을 맡아 23년간이나 마을 일을 맡아 보았다. 이장을 하는 동안 새마을 사업이 시작됐고 그때는 정말 정신없이 일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 마을이 군내에서 제일 먼저 도지정 자립마을, 복지마을 등으로 선정되었고, 그때 한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마을 안길이 넓혔는데 요즘 그 덕을 본다며 웃었다.
“어릴 적 명절 때면 어머니와 동네 아낙들이 모여 앉아 기왓장을 구워서 빻은 가루를 묻혀 짚으로 놋그릇을 닦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는 김선익 유기장은 “요새는 수세미로도 잘 닦이지만 그래도 유기를 잘 관리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며 식당에서 관리가 잘 된 유기그릇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고 한다.
김 유기장은 “이제 다른 욕심은 없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업을 영위하다 아이들한테 잘 물려주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동생과 함께 봉화유기 명맥 이을 것”
고태주 봉화유기 대표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열여섯살 때부터 유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천직이었어요. 유기 만드는 일이 외에는 농사고 뭐고 아무 일도 할 줄 몰랐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21살 때 먹고살 길을 찾아 서울로 갔는데 거시서도 유기 공예품 만들어 수출하는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즈음에 고향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다시 유기제작에 몰두해 봉화유기의 맥을 되살려 냈지요.”
봉화유기 고태주(64) 유기장은 아버지 고해룡 유기장이 당뇨로 건강이 나빠지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비법을 전수 받았다.
그에 앞서 막내동생 호규(52)씨는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다. 아버지는 기물의 형태를 다듬는 ‘가질’을 하고 동생은 부질 녹인 쇳물을 부어 모양를 만드는 ‘부질’을 했다.
지금도 고태주 고호규 형제는 봉화유기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다. 2004년 고해룡 유기장이 별세하고 2005년에는 고태주 대표가 문화재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고 2009년에는 호규씨가 전수교육보조자로 지정받았다. 배우는 데도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다 보니 일을 같이할 사람을 구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최근에 유기에 대한 수요가 많이 줄었습니다. 주문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도 이전의 절반 밖에 안 됩니다. 생활 유기는 종류가 참 많아서 천 가지는 될 거예요. 그런데 점점 찾는 사람이 없다 보니 이제 더는 만들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예전에는 공예품도 많이 팔렸는데 이젠 밥그릇, 수저 같은 것들만 팔리니 신선로 같은 물건들은 만들어놓을 수가 없어요. 언제 다시 만들 날이 올지 모르니 중요한 것은 따로 보관은 하겠지만, 내년 봄에는 생산품 종류는 종류를 많이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가볼만한 곳
◇청량산 도립공원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위치한 명산이다. 주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금탑봉·연화봉·축융봉·경일봉·선학봉·탁필봉 등 30여 개의 봉우리들이 있다. 높이 870미터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봉우리마다 수려한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어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산을 예찬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세운 청량정사가 남아 있다. 산의 남쪽 연화봉 기슭에 내청량사가 있으며 조선 후기의 불전 건물인 유리보전(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 있다.
◇닭실마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경승지로 칭송한 곳이다. 닭실마을은 풍수설에 의하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충재 권벌 선생이 은거했던 곳으로 후손들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와 관련된 청암정, 삼계서원, 충재일기, 근사록, 전적, 고문서 등 보물이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닭실마을은 전통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어 영남 지방의 기품 있는 반촌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봉화 국립백두대간 수목원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조성된 백두대간 국립수목원은 총면적(5천179ha)로 생태탐방지구(4천973ha)와 중점조성지구(206ha)로 구분되어 있다. 생태탐방지구는 금강소나무를 대표 수종으로 하는 자연생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50년 철쭉군락지와 꼬리진달래 군락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