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가구 40명 사는 오지마을
옛부터 수호신 ‘돌할매’ 모셔
“한가지 소원 꼭 이뤄진다더라”
전국서 관광객들 몰려들어
도로포장하고 문화센터 짓고
조용한 시골에 활력 불어넣어
마을 살린 ‘진짜 수호신’으로

20가구가 흩어져 사는 산골오지마을이 수호신으로 모시던 돌할매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해마다 10만명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전영호기자
20가구가 흩어져 사는 산골오지마을이 수호신으로 모시던 돌할매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해마다 10만명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전영호기자

 

2019 경상북도 마을이야기 – 영천 돌할매마을

‘돌할매 마을’의 공식 명칭은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관리(冠里)이다. 관산(393.6m)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남동쪽의 관산과 북서쪽의 평용산(338.5m) 사이의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형성됐다.

역사는 450년쯤 되지만 농토가 적은 오지마을이어서 인구도 많지 않다. 주민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멧돼지, 고라니들은 설쳐대니 골짝에 있는 밭은 묵힌 지 오래됐다. 벼농사 그만둔 지도 몇 년이 됐다. 지금은 20가구에 4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오래전에 없어졌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이 마을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돌할매 덕분이다. 돌할매는 지름 25㎝에 무게는 약 10㎏이 나가는 알처럼 생긴 화강암이다. 마을 사람들은 돌할매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왔다. 동제는 지내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대소사가 있으면 돌할매에게 치성을 드렸다. 돌할매는 아이를 바라는 소원을 잘 들어줘서, 마을에 대가 끊긴 집은 없었다고 한다.

정현웅 이장은 어린 시절 겪은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주었다.

“원래 돌할매가 있던 자리는 지금 돌할매 문화센터 근처 개울가에 있었습니다. 하천부지 청석 위에 놓여있었는데, 제가 어릴 때는 얼음 위에 굴리며 놀기도 했어요. 어른들이 꾸지람을 했지만요. 그래도 집에 갈 때는 꼭 제 자리에 갖다 놓고 갔어요. 한번은 아버지가 논에 물 대려고 머슴에게 보를 막으라고 시켰습니다. 그 사람은 돌할매가 뭔지 모르니 보 막는 데 돌할매를 가져다 썼어요. 그러고는 집에 와서 아파 죽겠다고 난리를 쳤지요. 돌할매에 손을 댔지 싶어서 가보니 돌할매가 없어요. 그래서 보 밑에 들어가 있던 돌할매를 찾아 건져내서 원래 자리에 올려놨습니다. 그러고 나니 머슴은 멀쩡해졌지요.”

이렇게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오던 돌할매가 외부에 알려진 1990년대 초, 사람들은 좁은 비포장길을 달려 오지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한 마을 사람이 하양읍으로 이사를 나가 살게 되면서였다. 그 사람은 부모가 돌할매에게 빌어서 환갑에 얻은 자식이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그를 따라 소원을 빌거나, 소원이 이뤄질지를 점쳐보려고 돌할매를 찾아왔다.

입소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93년쯤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24시간 줄을 설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돌할매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나서게 됐다. 그동안 돌할매를 훔쳐가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함부로 다루거나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었고, 복전함을 분실할 뻔한 일도 있었다. 지금은 CC-TV도 설치돼 그런 위험을 거의 사라졌다.

돌할매
돌할매는 지름 25㎝, 무게는 약 10㎏의 큰 알 모양의 화강암이다.

돌할매가 유명해지자 돌할매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법원은 마을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또 곳곳에 ‘짝퉁’ 돌할매가 생겨났다. 주민들은 안내판에 “각처에 산재한 우리 돌할머니와 유사한 명칭의 돌은 이곳 돌할머니와는 무관합니다”라고 적어놓았다.

주민들은 돌할매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1998년에는 돌기둥에 기와지붕을 올린 건물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도로변에 벚나무를 심고 주차장도 마련했다. 2010년부터 시행된 돌할매 권역(반정3리·관리·내포리·자포리) 마을종합정비사업으로 이 마을에는 돌할매공원과 돌할매 문화센터가 조성됐다.

밤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돌할매는 365일 24시간 개방한다. 돌할매를 관리하기 위해 주민들은 2인 1조로 24시간 근무를 한다. 처음에는 15명이 시작했으나, 이제 8명이 남아 나흘에 한 번씩 돌아온다. 연 10만명 정도가 돌할매마을을 찾아온다. 특히 연초에는 한해 신수를 물어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신년 해맞이를 하고 들르는 사람들도 많다. 봄가을에는 관광 버스가 수시로 들어온다.

돌할매조형물
돌할매공원의 돌할매 상징 조형물.

소원을 물을 때는 먼저 아무 생각 없이 돌할매를 들어본다. 10㎏정도 되니 누구나 들 수 있다. 그리고 소원을 묻는 사람의 신분을 밝히고 소원을 빈 뒤에 다시 돌할매를 들어본다. 밑에서 자석이 잡아당기는 듯이 돌할매가 처음보다 무겁게 느껴지거나 들리지 않으면 그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정성이 지극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한다.

처음에 입소문으로 알려진 돌할매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작은 산골 오지마을의 당산 역할을 하던 돌할매가 지켜야 할 민속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돌할매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돌할매를 만나고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일도 잘 풀리는 느낌이라고 한다. 어릴 적에 돌할매가 점지해 줘서 태어났다는 사람들도 이제 어른이 되어 찾아오기도 한다.

돌할매마을문화센터
돌할매 권역 마을종합정비사업으로 건립된 돌할매마을 문화센터.

돌할매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덕분에 도로포장도 일찍 됐고, 주민들도 고향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다. 할머니들은 손님들에게 푸성귀 등을 팔아 용돈 벌이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할아버지들도 돌할매 관리를 하며 복전함 수입으로 품삯을 받는다. 복숭아, 미나리 등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홍보와 판매에 도움을 받고 있다. 돌할매 손님이 많아서 다른 마을의 당산 신은 마을이 쇠락하면 함께 사라지지만, 이 마을 돌할매는 사라질 마을을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되살려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대를 이어 모신 돌할매가 자신이 이 마을의 수호신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서영진·김광재기자

정현웅이장
“관광객 붙잡을 볼거리·즐길거리 절실”, 정현웅 이장
 

“지금도 한 해 10만 명이 다녀갑니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을 몇 시간이라도 머물게 할 요소가 없어서 안타까워요. 지나는 길에 들러 잠시 돌할매 들어보고 경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화센터에 방이라도 한 칸 더 만들고, 관산과 평룡산 둘레길을 조성해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평룡산이 높지는 않아도 영천시내와 대구 동구까지 탁 트여서 전망이 좋거든요. 도계서원, 만불사, 임고서원 등 인근 명소들과 함께 관광벨트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볼거리, 즐길 거리를 만들어 놓으면 우리 마을뿐 아니라 영천의 관광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정현웅(사진) 돌할매마을 이장은 관광 명소화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에 마음이 답답한 마음이다.

“우리 마을은 주민 수도 적고 다들 고령이어서 마을 자체 역량으로 사업을 벌일 수 있는 형편이 안됩니다. 채소 재배 단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사람 5명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 복전함 수입도 관리비용 제하고 나면 별로 남지않아요. 그러니 마을 활성화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서로 윈윈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 이장은 권역사업으로 만들어진 돌할매문화센터에 최근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작업을 하고 있어 다행스럽다고 한다.

앞으로 문화센터에서 전시회도 열 계획이어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는 석공예, 목공예를 하는 사람 등 홍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돌할매마을은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가볼만한 곳>

노계문학관
 

◇노계문학공원, 박인로 생애·문학정신 ‘한눈에’

1561년(명종16) 영천에서 태어난 박인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와 수군절도사 성윤문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1599년 무과에 급제, 수문장·선전관을 지내고 조라포 수군만호로 선정을 베풀었다. 사직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노계문학공원에는 노계문학관, 도계서원, 소공원, 노계묘소 등이 있다. 노계문학관은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조성한 전시실과 영상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계서원은 노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1707년(숙종33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건립했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해 훼철됐다가 1970년 세워졌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노계집’ 판목은 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만불사
 

◇만불사

만불사는 유서 깊은 고찰이 아니라 포교원을 기반으로 근래 건립된 사찰이다. 만불회는 1987년 서울·부산·대구에 포교원을 설립했으며, 1993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 진신사리 5과를 영천 만불사에 봉안했다.

사찰 이름에 걸맞게 여러 모습의 수많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불상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33m 영천 아미타대불, 황동 와불 열반상, 황동 만불 대범종, 인등대탑, 만불보전, 관음전, 대웅전, 법성게 법륜, 수정유리광 여래불, 복주머니, 유자영가 등이 조성돼 있다.